앤터미 비버(지음), 김원중(옮김), <스페인 내전,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교양인, 2015(11쇄)

[주요 연표]
1879, 에스파냐 사회주의 노동자당 설립 PSOE, Partido Socialista Obrero Español 설립
1888, PSOE 산하 노동조합조직인 '노동자 총동맹' UGT, Unión General de Trabajadores 출범
1909, 바르셀로나 봉기후 아나크로 생디칼리스트 노동조합조직인 '전국노동연합' CNT, Convención Nacional de Trabajadores 설립
1917,  광산지역 파업, 진압에서 프랑코 활약
1919, La Canadiense 공장 파업, 세계 최초로 8시간 노동 쟁취 
1921, 안드레스 닌 등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타 중심으로 에스파냐 공산당 PCE, Partido Comunista de España 출범
1923, 카탈루냐의 총 사량관 Miguel Primo de Rivera 쿠데타, 1930년까지 독재관
1931, 1월 대학생 파업, 4월 바스크 지역에서 공화국 선포, 알칼라 사모라가 국가 수반이자 총리로 취임. 
1933, 10월, 가톨릭에 중심을 둔 보수적인 신정 국가를 꿈꾼 팔랑헤당 출범, 
          11월 총선, 여성 참정권 등 보장되고 중도 우파 집권, 새로 출범한 공화국 정부도 여전히 권위적인 통치로 일관, CNT가 전면전을 선언           
1934, 선거에 패배한 사회주의 노동자당의 라르고 카바예로(급진파)가 장악, 혁명위원회 설립 
1936, 2월, 인민전선이 15만표차로 승리하여 의회의 절대다수를 차지, 팔랑헤당은 총 득표수가 4만 6천표에 그침 
          4월, 의회 소집, 5월 마누엘 아사냐가 대통령에 취임 
          7월 18일, 프랑코를 중심으로 쿠데타 발생, 쿠데타 발생 48시간안에 모든 지역의 점유지역이 결정 
1936, 9월 4일, 라르고 까바예로가 총리로 취임, 서유럽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한 최초의 정부가 됨 
         9월, 스탈린이 '스페인 인민들의 투쟁을 지지하기 위한 캠페인'을 발표, 이후 53개국에서 3만 2천~3만 5천명이 참전 
                지식인 비중은 소수, 80%가 육체노동자들이었고 취업을 위한 참전도 다수, 소련에서는 연인원 2천여명을 파견
         10월 1일, 프랑코 총통 위임 Caudillo(지도자)로 불림, Führer나 Duce를 따라한 것
1936, 11월, 마드리드 공방전, 모두의 예상을 깨고 공화진영이 마드리드를 수성(수도는 발렌시아로 이전한 상태)
        "마드리드 전투가 실패하면서 쿠데타는 전면적인 내전으로 바뀌었고, 국민군은 외국에 더 많은 도움을 요청했으며, 
         이제 스페인 내전은 거의 세계전쟁의 양상으로 발전했다."(335쪽)
1937, 2월, 하라마전투로 전선이 교착상태, 국민군의 정예 병사가 손실 
         3월, 과달라하라 전투, 이탈리아군이 주도하였으나 장갑차 동원 작전이 실패(독일이 후에 이를 다시 개량)
                브리웨가 전투는 전쟁 기간을 통틀어 공화군이 분명하게 승리한 거의 유일한 전투 
1937, 3월 바스크 지역 공격 시작
         4월 26일 오후 4시 30분, 게르니카 폭격 시작, 시민의 1/3이 사망(1654명 사망, 889명 부상)
         "프랑코는 바스크 지역 전투를 통해 자신의 동맹군들이 적의 동맹군보다 훨씬 우수한 타격 수단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확인했다."(423쪽)
         4월 17일, 통합 팔랑혜당 출범, '하느님을 지향하는 제국을 위하여'가 슬로건, 프랑코는 36년 9월 이후 법률상 지도자, 37년 4월 사실상 독재자 
1937, 5월, 카탈루냐 내전 발생, 아나키스트 연합이 패배, 공산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트로츠키주의자-파시스트'의 도발로 규정 
         5월 17일 라르고 카바예로 사직서 제출, 네그린이 국무회의 의장이나 재무장관, 안드레스 닌을 포함한 통합 노동자당 지도자 전원체포
1937, 5월, 6월에 바스크 지역의 압박을 풀기위해 브루네테 전투 시작, 병참 부족과 지휘관들의 소통 부재, 
         국민군의 압도적인 공군력으로 대실패
         공화군은 2만 5천 사상자, 장갑차의 80%, 전투기 1/3상실, 패배의 원인을 국제여단의 '제 5열의 체계적 공작'이라는 공산당의 주장 
1937, 8월, 아라곤 전투, 역시 북쪽 바스크 지역을 돕기 위한 전투였으나 이미 국민군은 산탄데르에 입성 직전. 
         10월, 북부 지역 마지막 공화지역인 히혼 합락, 병력을 남으로 재배치하고 광물자원을 독일에 채무 변재로 사용하기 시작 
1937, 12월~1월, 테루엘 전투, 의미없는 지역에서 벌어진 최악의 전투중 하나
1938, 3월, 카탈루냐 봉쇄작전 시작, 3월 우에스카, 4월 레리다, 비나로스 함락으로 마무리 
         "프랑코가 갖고 있는 승리의 칼이 빨갱이들이 장악하고 있는 스페인을 둘로 갈라 놓았기 때문에" 성전의 종식을 믿어 의심치 않음(571쪽)
1938, 3월, 네그린의 프랑스에 도움 요청, 그러나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으로 물거품 
         4월, 영국-이탈리아 조약 체결, 이탈리아 군대의 스페인 주둔 허용
1938, 7월 18일, 쿠데타 발발 2주년, 프랑코가 총사령관이자 국가 수반, 군대의 총통이자 통합 팔랑헤당의 국가수장으로 추대 
1938, 7~8월, 에브로강 전투, 113일동안 국민군 6만, 공화군 7만 5천이 사망하고 공화군의 거의 모든 무기가 손실, 
         압도적 공군력을 보유한 국민군을 상대로 강을 건너 열린 공간에서 전투를 한 공화군 전략의 치명적 실패 
1938, 12월 카탈루냐 공격 시작
1939, 1월 프랑스 국경 민간인에 개방 20만명 이상이 통과, 2월 인민군 패잔병 입국, 1월 이후 총 50만명이 통과 
1939, 2월 카탈루냐 점령, 프랑코는 정치책임법을 발표, 반대자들에게 정치적 책임을 물을것을 선언, 영국과 프랑스는 국민정부 공식 승인 
1939, 3월, 반 공산주의 쿠데타 발생, 이후 내전 종료 
1939, 8월 국가수장법 발표로 국가 비상시 국무회의 의결없이 법령, 포고문 재가 권리 확보    

[주요 고려요소]
- 공화정부는 노동자에게 무기지급을 거부, 치안대나 돌격대의 결심이 초기 향방을 결정 
- 라디오 방송, 전화국, 비행장등이 중요 역할을 수행한 최초의 현대적 쿠데타 
- 초기 전력은 13만명의 장교병사(국민진영) vs. 9만명의 장교/병사, 히틀러와 무솔리니, 미국/영국의 사업가들이 대부와 석유를 국민군에 제공 
- 공화진영은 중앙정부의 지리멸렬한 대응(우파의 반란을 진압+ 좌파 혁명 대응)과 경찰,외교관 등 공무원의 이탈로 국가 매커니즘이 붕괴된 상태 
- 반면 국민진영은 병영국가체제의 성립으로 일사분란한 지도 체제를 형성하기 시작, 특히 알카사르 작전 등에서 영웅으로 떠오른 프랑코를 중심으로 단일 지도체제 형성 시작 

- 무기의 필요성으로 국민/공화 모두 외국이 도움이 필요, 국제전으로 발전하게된 요인 
- 영국은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행동은 무시하면서 공화진영의 무기 수입을 감시하는 이중적 태도, 
  "영국이 전쟁 초기에 볼셰비즘의 공포에 휩쓸려 들어가기보다는 국민 진영이 신속하게 승리하는 것이 낫다고 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국인들의 주요 관심사는 다른 데 있었다. 그들은 스페인이 소련의 영향 아래 떨어지는 것도 싫었지만 스페인이 나치 독일이나 혹은 지중해에서 자신의 주요 라이벌인 파시즘 이탈리아에게 지배당하는 것도 좋지 않게 생각했다. 그들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스페인 내전이 제2의 사라예보가 되어 거대한 개입의 물결을 만들어내고 결국에는 다시 한 번 전 유럽의 전쟁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736쪽)
- 독일은 새무기와 전술의 시험장이자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코를 지원, 결과적으로 융커87(스튜카기), 티거 전차 계량에 도움을 받음과 함께 바스크 지역 철광과 석탄을 보상금으로 획득 

- 내전중에서도 내전이 발생, 공화진영내 공산주의자와 그외 대결, 국민진영내 팔랑혜당 통합과정에서의 권력 다툼
- 공화진영은 애초부터 전력상 열세였으나 지도부의 분열과 무능으로 패배를 자초 

-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정상적인 '정화' 욕구로 내전 종식 후 190개 수용소에 최대 50만명을 수용, 공식적인 처형만 3만 5천명, 간접적 죽음까지 약 20만명 사망 추정 
- 프랑스에 망명중인 사람들에게는 2차 세계 대전이 고달프로 격렬한 내전의 연장, 공화진영 난민들이 군대에 자원 입대하였음 
- 내전의 참혹함은 종교적 이유 등으로 상대를 비인간화 하면서 잔인함이 더욱 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