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지음), <에로스를 찾아서 : 사랑과 아름다움에 관한 성찰>, 라티오, 2017

책 읽는 방법

1. 본문을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는다. 주해가 있더라도 뒤로 가지 않는다. 
2. 주해를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는다. 
3. '찾아서' 시리즈의 전작인 <숨은 신을 찾아서>와의 연결고리를 생각하며 읽는다. 

확실히 선생님께 직접 배운 <향연> 등의 내용은 잘 이해가 되는 반면, 녹음파일만 듣고 공부한 파노프스키, 카시러, 헤겔 등은 깜깜하다. 선생님은 '찾아서' 시리즈를 최소한 7권은 낼 거라 말씀하셨다. 

----------------

"세상의 이치는 이러하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온전히 우리 자신의 의지로써 결정할 수 없다. 계몽주의 이래 주체에게는 지속적으로 보존되는 자기 정체성이 있다고 믿어 온, 자기 완결적 개체를 추구하는 근대인은 이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다. 근대인은 수업이 많은 정체성을 자신 안에 들여오면서 "많이도 떠돌아 다닌", "꾀가 많은" 오뒷세우스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더러는 더 사랑스러운 것, 다 아름다운 것, 더 좋은 것에 대한 갈증이 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에서 뭔가 아쉬움을, 결핍을 자각하면서 이러한 갈증이 생겨난다. 결핍의 자각과 필연적이지는 않아도 그에 이어지는 충족에의 갈망이 '에로스'라 불리는 것일 게다."

당신이 한 말은 모두 도리에 맞는 말이오


"그러면서도 헤겔은 그것이 그저 덧없는, 한때의 행위의 소산에 그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영원히 존재하는 절대적 정신이 구체적 현존을 얻어 지상에 현현하는 것이라 강변한다. 그렇다 하여도 우리 시대는 절대적인 것을 놓아 버렸다.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것 뒤에 어떤 보이지 않는 빛의 실이 연결되어 있음을, 절대적 정신이 숨어 있음을 승인하지 않는다."

 정신은 감각적인 것에 발을 내딛으면서도


"앙리 4세가 죽은 지 20년 이후에 그려진 이 작품은 평화에 대한 루벤스의 소망을 넘치도록 반영한 탓인지 절제의 선을 넘어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충실히 지켜졌던 조화와 비례를 저 멀리 팽개쳐 버렸다. 세상은 여전히 신을 필요로 한다. 눈앞의 현실이 참혹할수록 신 닮은 무엇에라도 매달리려 했을 것이다. 그것이 군주에 대한 흠모로 표출되었다. 앙리 4세를 지상에 내려온 신처럼 찬양하려는 화가의 예술의욕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천상으로부터 초월성을 '탈취해서' 그것을 제 몸에 두르고 17세기의 '예외상태'를 절멸시키려는 군주의 의지. 이는 인간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분열을 극복해 주기를 바라는, 지상의 존엄체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다."

"매너리즘에서 징후를 볼 수 있었듯이 예술은 시대와의 깊은 연관 속에 놓이므로, 갈등의 해소, 격정적인 표현주의적 예술의지, 강력한 인물들, 장엄한 극적 양식, 격앙된 극적 순간 등과 같은 예술작품의 표현태들은 여전히 신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는 있으나, 극도로 불확실하고 불안한 시대에 눈앞에 현전하는 초월적인 존재를 통해서 불확실함과 불안을 극복하려는 시도로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설득력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 예술작품은 작품 안에서 완결되지 않으므로 작품 안에서 해석이 끝나지 않고 항상 시대와의 접점을 찾아야만 이해 가능한 대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름다의 이념 또한 초월적인 자체 존재가 아니라 시대적 연관 속에서 규정되는 것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탈취, 본문 및 주해 41


"미켈란젤로의 '노예들'은 고통받는 인물들을 과장되게 표상하고, 파르미지아니노의 <긴 목의 성모>는 기이한 자세로 않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몸짓을 하고 있다. 품안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건지 아니면 흘러 내리도록 방치하고 있는지, 그것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다.... 바로 그 그림(살가죽이 벗겨지는 마르시아스)을 그린 이가 30여 년 전 쯤에는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그린 티치아노라는 걸 믿을 수 있겠는가."

"콰트로첸토의 '위대한 양식'과 아름다움의 이념은 말 그대로 이상적인 것이어서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짧은 이상주의적 시기가 지나면서 곧바로 객관주의가 해체되고 여기에 예술가의 자의식, 즉 모방자가 아닌 창조자로서의 자기 규정이 덧붙여지면서 이른바 '고딕화 현상'이 나타난다. 엄격한 비례에 의해 구축되었던 공간의 통일성이 사라지고, 공간의 가치가 같은 화면에서 서로 다르게 매겨졌다. 회화는 갈등을 표현하고 예술가가 초자연적 경험으로 침잠하거나 양식을 의식하지 않는 회화들도 나타난다."

위기, 주해 37


"티치아노는 <우르비노의 비너스>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의 합치를 완성한다. 이 회화를 얼핏 보기만 해도 우리의 영혼과 감각은 이제껏 체험하지 못했던 조화 속에서 통일되며, 사랑은 아름다움에 대한 아련한 동경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으며, 그 아름다움은 만물의 균형 잡힌 모양, 그리고 일치와 조화에서 번져 나오는 우아함에 기인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쿠자누스, 알베르티, 피치노의 모든 변설이 이 회화 하나에 응집되는 것이다."

사랑이 당당하게


"인간을 사랑하면 곧바로 절망을 대가로 얻게 되지만 신을 사랑하는 것은, 죽도록 충족에 이를 수 없다는 본연의 양상 때문에 죽을 때까지 사랑을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그리하여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영원한 사랑을 구가하는 극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신적 모방(imitatio divinorum), 신과 같은 본성을 갖고자 하는 것, 신과 하나가 되려는 것, 이것은 신의 자비(caritas)와 인간의 사랑(amor)의 결합이다. 이러한 결합은 인간을 관상적 삶에 이르게 하고, 그러한 삶은 학문과 예술을 창조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끝없는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게 해 주시길 빕니다, 본문 및 주해 32


"알베르티는 비례의 원리를 회화에 적용함으로써 '르네상스 고전기'의 양식원리(Stilprinzip)를 정립한다. 알베르티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근본적인 자연법칙인 균형에 근거하며, 부분의 전체에 대한 어울림, 명확한 수에 따른 비례와 질서가 이루어 내는 조화에서 성립한다.... 원급법은 인간의 시각으로써 무한한 세계를 구축하려 한다. 원근법으로 구성된 공간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연속적이고 동질적으로 구성된 '체계공간'(Systemraum)에 있게 되어 인간은 이것들을 하나의 시점에서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게 된다. 원근법으로써 세계를 보기 이전의 회화들은 사물들 각각을 그 자체 독립된 것들로 모아둔 '집합공간'(Aggregtraum) 안에 배치하였다. 이는 사물들을 제멋대로 모아둔 것처럼 보이지만, 체계공간 안에서 보느냐 집합공간 안에서 보느냐에 따라 세계는 다르게 파악되므로, 사물을 어떤 방식으로 보느냐는 화가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단초라 할 수 있다.... 후대의 인상파 화가들이나 입체파 화가들은 그러한 이상화된, 또는 신적 입장에 올라선 시점을 폐기하고 눈앞에 놓인 현상들의 순간적 집합 인상(또는 인상 묶음)을 나열하거나, 그러한 다양하고 다면적인 인상을 묶어서 전체를 재구성해 보려 한다. 이들의 시도는 근본적으로 '르네상스 고전기'를 지배한 양식원리인 원급법과의 연관 속에 있는 것이다."

예술적으로 재현한 것, 주해 27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 비율을 사용했으므로 인간이 세계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비율을 사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현상세계의 사물들이 서로 대립되어 보인다 해도 이성의 힘으로써 그것이 무한자를 내재한 유한자임을 파악한 다음에는 각각이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알아내는 방식이 비례이다.... 이처럼 쿠자누스에 따르면 비례는 창조의 원리이고, 그런 까닭에 이 비례를 측정하는 것은 제 2의 자연을 창조하는 제작자, 즉 창조주 닮은 자의 행위가 된다. 바로 여기에 쿠자누스의 유한자와 무한자의 연관 문제가 예술작품의 창조에 원용되는 근거가 있다."

닮은 것은 닮은 것에서 태어나니, 주해 25


"플로티노스는 이편의 아름다움이 저편의 아름다움의 모상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과 함께 이 모사물의 아름다움을 벗어나야만 참다운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향연>에 제시된 '디오티마의 사다리'와 구분된다. '디오티마의 사다리'에 따르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는 아름다운 몸에서 시작하여 점차 위로 올라가면서도 이전에 알게 된 것들을 폐기하지 않는다. 플로티노스에서는 참다운 아름다움을 알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앎이 폐기되어야 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모상과 원형을 연결하는 빛의 비춤(illuminatio)과 그 빛에 힘입은 정신의 파악이다. 또한 수와 비례에 의한 파악은 감각적인 것에 국한된다.... 이는 플로티노스에 대한 확장된 해석이기는 하겠지만, 그가 제시하는 빛의 비춤(illuminatio), 일자로부터의 유출(emanatio)이 예술창작의 원리적 개념으로 전용될 가능성을 함축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넘어선 아름다운, 주해 23


"유다는 예수의 말을 거역하지 않았다. 그가 예수의 말을 거역하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더라면 구약의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을 것이요, 그에 따라 하느님의 계획은 무너졌을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의 말을 충실히 따른 유다는 예수를 사랑하지 않았는가. 누가 예수를 가장 사랑하였는가.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인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 예수와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 예수와 유다. 스승과 제자의 사랑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때는 밤이었다


"그것은 다른 학문들처럼 결코 말로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제 자체와 관련하여 이루어진 오랜 교유와 공동생활로부터, 예컨대 튀는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혼 안에 비로소 생겨나서 비로 자기자신을 스스로 길러 내기 때문입니다." 플라톤, <편지들>

진리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들이 모여서 '공동 생활'을 하면서 성취하는 것이므로 보편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무엇이기는 하지만, 말로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공교公敎적인 것이라 단언할 수 없다. 그런데 이들이 모여서 하는 일은 무엇이겠는가. 폭넓게 말하면 '연습'(meletē)이라 할 것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비례에 의존하든 갑자기 이루어지는 올라섬에 의존하든 연습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비례를 알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체득하여 나날의 자잘한 삶에서 구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배워서 알게 된 것이라 해도 연습의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숙련에 이를 수 없고, 숙련에 이른 사람만이 갑작스러운 비약을 겪을 수 있다. 배움과 연습이 경계가 불분명한 상태로 이러한 연속체 안에 있음을 확고하게 전제한다면, <향연>과 <티마이오스>의 주장은 상충되지 않는다.

불꽃에서 당겨진 불빛처럼 혼 안에 비로소 생겨나서, 주해 19


"알키비아데스는 아름다움에 이르지 못한, 그러나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그는 알키비아데스와 그리 다르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갔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에게 이야기를 들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밤새 술을 마시고도 취하지 않으려 하고, 남들이 다 잠들었을 때 아침에 목욕을 한 뒤 하루를 여느 때와 다름없이 멀쩡하게 보낸다. 알키비아데스는 술을 마시지 말고 일찌감치 아가톤의 집에 도착하여 소크라테스가 전해 주는 이야기를 들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 담긴 것들을 날마다 실천하려 했어야만 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폴로도로스의 부지런함을 보라!"

이런 건 조금도 겪어 본 적이 없네


"<향연>에서 제시된 '디오티마의 사다리'가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그것에 이르고자 하는 에로스의 도정에 관한 것이라면, <티마이오스>에서는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은 균형잡힌 것이라는 주장이 제시된다. 이는 비례와 척도라고 하는 객관적 방식이며, 이것이 '양식'樣式의 단초가 된다. 따라서 플라톤은 <향연>에서는 예술가의 창조적 힘과 기능에 대해서, <티마이오스>에서는 양식의 규준을 제시함으로써 예술의 주요 영역에 관한 전범을 내놓은 셈이다."

모든 좋은 것, 주해 15


"특히 '디오티마의 사다리'라 불리는 부분은 에로스의 상승하는 힘과 각 단계를 에로스가 산출하는 것들에 대응시키면서 상세한 서술을 제시한다. 좋음과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욕구를 가졌다고 해서 누구나 혼자 힘으로 이 상승의 단계를 올라갈 수는 없고 반드시 인도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인도자의 도움을 받으며 이 상승의 단계를 올라가는 과정은 계속해서 뭔가 새로운 것을 산출하는 과정이다. 인도자가 곁에서 지켜보지만 그 단계를 겪는 것은 에로스를 가진 사람이고, 그는 자신이 만들어 낸 것에 대하여 어떠한 해석이나 비평을 하지 않는다.
(...)
그런 까닭에 이 단계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향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확신적 진리를 낳아 놓는 도정이다. 초월적인 곳에 실재로서 존재하는 진리를 재생하고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진리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활동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향연>에 제시된 '디오티마의 사다리'는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라기보다는 미적인 것을 창조하는 '예술적 창작활동'에 대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놀라운 것, 주해 13


"미란 무엇인가, 무엇을 미로 규정할 것인가, 미라는 속성을 가진 대상이 자체로 있는가 -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객관적 미에 대한 탐구가 가능하다는 전제 위에서 수행하는 학문 분과가 미학이다. 그러므로 미학은 현전하는 대상을 분석하고 기술하면서 그 안에서 미적인 것을 발견하려 하기보다는 미 자체를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의 탐구와 마찬가지로 원리적 학문이며, 바로 그러한 이유로 미학을 아무리 폭넓고 깊게 연구하여도 미에 대한 안목이나 예술 일반에 대한 소양이 깊고 넓어지지는 않는다. 플라톤의 미학에 대한 연구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은 아마도 알고 계시겠지만, 주해 11


덧글

  • 거대한 범고래 2017/12/10 11:04 #

    안녕하세요...강유원 선생님 강의 추첨에서 몇 번 실패하고 시간이 허락되지 않아 책으로만 읽고 있습니다.
    파노프스키, 카시러, 헤겔에 대한 강유원 선생님 녹음파일 있으시면 공유 부탁드립니다.
    언젠간 강유원 선생님 강의를 직접 듣고 싶습니다.
    kimjj3020@gmail.com
  • 여형사 2017/12/24 04:37 #

    라티오 출판사에 문의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래 페이지를 방문하세요. http://ratiopress.com/?page_id=5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