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지음), <철학고전강의> 읽기 (3) 수업




"고대와 중세에 인간은 진리의 규준이 천상에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하늘에 고착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은 현세를 잊었습니다. 그렇지만 근대에 들어 현세에 탐닉하기 시작한 인간은 천상을 잊었습니다. 초월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갈망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것에 대한 성급한 갈망이 열광적인 방식으로 추구되고 있습니다. 이제 철학이 해야할 일은 천상의 초월적인 것을 탐색하되 개념적인 방식으로 탐색하는 것입니다. 
(...)
헤겔 시대에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요구가 무분별한 낭만주의적 열정으로 표출되었고, 헤겔은 이를 눈앞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칸트의 비판을 의식하면서 동시에 낭만주의적 열정이 가진 무분별함도 보았습니다. 헤겔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학적 접근을 시도하면서도 섣부른 열광에 빠지지 않는 사다리를 <정신현상학>에서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교양을 쌓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긴 도정"과 "풍부하고도 심오한 운동"이 요구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적당한 "상식"이 철학적 사색으로 간주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섣부른 "천재성"이 횡행하는 시대에는 그것마저도 철학적 사색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개념"이 무엇인지, "착락적 언사"가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조차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적어도 "생선도 고기도 아닌, 시도 철학도 아닌 조형물" 정도는 식별할 줄 아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40강 : 헤겔 철학의 목적, 역사와 이념의 통일 

"헤겔은 데카르트의 주체 개념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진리에 대한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싶어 하는 인간은 그 기준을 자신의 삶 전체, 자신의 인식 과정 전체에 세웁니다. 진리의 타당성과 역사성을 묶어서 이성성으로 규정합니다. 여기서 근대적 주체성의 형이상학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Selbst)가 진리의 최종 심급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9강 : 진리의 역사성, 진리주체론

"신적 입장에 올라선 주체적 인간이 가진 것은 진리입니다. 이것의 진리성은 무엇으로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진리가 타당하다는 것은 진리의 입장에 올라서는 과정의 역사성에 근거합니다. 즉 신적 입장에 올라서서 진리에 이르렀다는 것은, 역사성과 보편적 타당성을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 역사성과 이 타당성을 결합한 것을 헤겔은 넓은 의미에서의 '이성성'(Vernünftigkeit)이라고 부릅니다. 이성성은 철저하게 몰역사적인 것처럼 여겨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헤겔에서 이성성은 철저하게 역사적 겪음에 근거합니다. 절대적 지는 신적 입장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삶의 모든 편력을 총체적으로 지양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정신현상학>은 정신의 서사적 편력의 역사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성에는 선과 악이 해소되어 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선과 악의 구별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최후의 귀결에 해소되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헤겔의 이러한 생각은 현존의 타당성을 역사로부터 길어올리는 근거가 됩니다. 지금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은 수많은 겪음을 통하여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성을 갖추었기 때문에 타당한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8강 : <정신현상학>의 구성, 의식-자기의식-이성

"헤겔의 이 시도를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명제로 정리해볼 수 있겠습니다. 
'좋음'은 선재先在하는 '본'本(paradeigma)이며, 현재의 과정에 임臨해 있는 작용인作用因이며 이 과정이 도달해야 할 목적(telos)이다. 
(...)
철학에 관해서는 단숨에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일반적인 표상"을 제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철학은 이념의 자기 전개 과정 전체를 서술함으로써만 비로소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 이념은 미리 정해진 것입니다. "뭔가 선취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념은 최초에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으나 스스로를 외부로 전개하여 그러한 운동의 과정을 거쳐서 자신으로 되돌아옵니다. 이 과정이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의 과정입니다. <철학백과>는 바로 이 과정 전체인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7강 : 사변적 사유와 정신철학에 대한 일반적 논의 

"무한자의 입장에 서서 모든 사태를 인식하는 것을 헤겔은 '개념파악적 사유'(Begreifen)라 합니다. <철학백과> 서론 2절에 이 술어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 술어는 일반적으로 헤겔의 사유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변증법'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
진리인 생성은 지향점 없이 무한히 계속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이라는 상위의 목적을 향해 갑니다. 이것이 역사입니다. 따라서 철학은 이 역사적 과정에 대한 관상이 되고, 신을 향해 가는 사태의 변전에 대한 통찰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철학, 역사 형이상학이 철학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사유가 바로 개념파악적 사유입니다. 전체의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이 전체의 진리를 서술한 것이 논리학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6강 : 헤겔 형이상학의 기본 개념들

"사상의 통일성은 실재적 구별의 폐기와 개념적 구별의 보존을 거쳐서 성립합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지양'(Aufheben)입니다. 이말에는 보존과 폐기라고 하는 반대되는 뜻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상은 정신의 전개의 실재적 구별과 개념적 구별을 지양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양'이라는 말로써 표현해보면, '씨앗이 싹으로, 싹이 꽃으로, 꽃이 열매로 지양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 전체를 알아야 우리는 상수리 나무라는 것에 대해 알 수 가 있습니다. 이러한 지양의 과정 전체가 식물에 관하여 참으로 말하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식물의 진리입니다. 식물의 진리는 식물의 성장 과정 전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는 전체다'(Das Wahre ist das Ganze)라는 명제가 여기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실재적 구별이 계속 폐기되면서도 개념적 구별이 보존되고 있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진리 전체론'이라고 말합니다.
 상수리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한 채 이 과정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신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될지 알고 있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삶은 앞을 알 수 없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신은 미리 알고 있습니다. 이미 그 삶을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의 입장에 올라선 인간은, 유한자이면서 동시에 무한자인 인간은 이 과정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5강 : 헤겔 철학 체계의 구성

"칸트는 대상에 관한 진리는 오성으로써 구성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좋음은 이성으로써 요청하였습니다. 아름다움과 숭고함은 판단력으로써 오성과 이성을 매개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판단력비판>은 자연 영역과 자유 영역을 매개하고 통일적 체계를 시도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체계는 확고한 학적 규정으로써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가 합목적성을 거론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정신 속에 상정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상정되는 한 형이상학은 여전히 난망한 작업이 되고 맙니다. 칸트는 자연과학의 도전에 직면하여 새로운 근거 위에 '장래의 형이상학'을 구축하고자 하였으나, 그러한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이 불가능함을 밝혀 보였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한자와 무한자의 통일에 이른다는 것이 인간 이성의 요구이기는 하나 좌절될 수밖에 없는 것임을 뚜렷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4강 : 판단력을 통한 오성과 이성의 결합

"'합의'는 과학의 원리가 아니라 정치의 원리입니다. 무엇이 아름다운가, 무엇이 올바른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는 합의나 동의만이 가능합니다. 확증은 불가능합니다. 합의에 이른 구성원들 모두가 그 합의를 지키기로 한다면, 그것은 주관적 보편성에 합의한 것입니다. 구성원들의 마음에서 합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그 마음을 달리 먹으면 합의는 깨집니다. 누가 어떤 마음을 먹든 깨지지 않는 것은 객관적 보편성입니다. 내가 그것에 합의해주지 않아도 지구는 태양의 둘레를 돕니다.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합의하지 않으면 우리가 사는 사회의 법질서는 지켜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공통감의 이념'(idee des Gemeinsinns)이라 할 때 이것에 합의하는 것은 주관적 보편성입니다. 칸트에서 '이념'이라 불리는 것들은 확증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동의되어야 하고 요청되어야 하고 상정되어야 하는 것들, 주관적 보편성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
칸트는 이데아로써 경험 세계를 완전히 구성하려는 플라톤주의자도 아니고, 자연과학적인 탐구를 통해서 알아낸 것을 가지고 세계를 전일적으로 구성하려는 자연과학주의자도 아닙니다. 자연과학이 사용되는 영역에서는 자연과학을, 이념으로써 세계를 통제적으로 이끌고 반성하려는 지점에서는 이념을 사용하는 어중간한 사람입니다. 이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3강 : 미감적 판단력, 목적론적 판단력 


"다음을 한번 읽어봅시다. "이러한 천성으로 인해 인간은 다른 사람의 운명에 관심을 갖게 되며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해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바라보는 즐거움만 얻을 수 있다 해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필요하로 한다"는 것은 무관심적 관심입니다. 이것에 속하는 연민과 동정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도 같이 느끼는 것입니다. 즉 공감(sympathy)입니다. 공감하는 과정을 풀어서 이해해보면, 내가 다른 사람의 감정 안으로 들어가서 그가 느끼는 고통의 조각을 가지고 와서 내가 느끼는 것입니다. 타자로 나아가서 그 타자로부터 나에게 뭔가를 가져와야 공감이 성립합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공통감각(sensus communis)일 것입니다.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공통으로 살아가는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개념은 사회와 역사에 대한 철학적 탐구에서 핵심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2강 : 판단력의 연원

"플라톤에서 인간은 초월적 앎에 이를 수 있다고 천명됩니다. 초월적 앎을 가진 자들은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최상 최고,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지만 <국가>를 읽어보면 통치자들은 세상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억지로 끌어내서 통치를 하게 해야 합니다. 맞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혜로움이 쓸모없는 곳으로 보입니다. 
(...)
플라톤 철학은 아주 철저한 현실 인식에서 시작했는데, 그런 현실들을 계속 추상하면서 궁극목적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에 이른 이들은 현실로 내려오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앞서 말했듯이 억지로라도 현실세계에 내려와 이론적 앎을 실천하게 합니다. 플라톤은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추구하는 철학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무한자에 이를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철저하게 긍정하고 있습니다. 플라톤 철학의 어떤 부분에는 인간에 대한 절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플라톤은 인간에게 희망을 가집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1강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형이상학의 핵심 문제

"그것을 방금 등장한 술어들로써 이해해보면 <순수이성비판>의 의도는 '인간 이성이 초월론적 이념으로써 통일적 체계를 사변적으로 구성하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형이상학적 요구를 가집니다. 다시 말해서 이성의 사변적 사용을 시도합니다. 그렇다면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형이상학 서설>은 이러한 요구의 충족을 위해서 이성을 어떻게 사용하면 형이상학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려는 시도입니다. 그렇다면 <순수이성비판>의 적극적인 목표 또는 숨은 목표는 형이상학의 올바른 정초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0강 : 이성의 사변적 사용

"오성이 사실 영역에서 주어지는 데이터를 구별하여 인식을 낳아 놓는 힘이라면 이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즉 경험 데이터를 가지지 않는 것을 요청하여 그것을 도덕적 가치 영역에서 실현하는 힘입니다. 이처럼 사실 영역과 가치 영역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을 통하여 내놓은 중요한 주장입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않고 혼동해버리는 것은 낡은 형이상학이 하는 일입니다. 낡은 전통적 형이상학은 인간이 신에 대한 앎을 가질 수 있다는 듯이 신존재를 '증명'하려 했으나 그것은 독단적인 단언에 그쳤습니다. 인간은 그것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
<판단력비판>에서 밝혀 보이는 미감적 이성은 예술철학과 정치철학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실천이성비판>에서 요청하는 도덕적 이성은 윤리학의 근거가 될 것이고, <순수이성비판>에서 성립한 오성은 과학의 근거가 될 것이며, <판단력비판>의 목적론적 이성은 우주론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칸트는 인간이 관여하는 네 영역에 관한 근본적인 근거를 마련합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9강 : '장래의 형이상학'의 성립 가능성

"인간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 중에서 철학자는 신의 얼굴을 다룹니다. 그런데 데카르트 철학에서는 인간이 신의 모상입니다. 인간은 신의 모상이므로 신을 향해 나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열정입니다. 열정이 있으므로 인간은 고난을 겪게 됩니다. 이것은 넓은 의미의 경험(Erfahrung)입니다. 인간이 겪어 가는 경험의 전 과정, 모든 계기가 다 모여서 총체성(Totalität)이 됩니다. 이것이 근대인이 살아가게 되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겪음을 시도합니다. 내가 유한자임을 자각하고 쌓아 올라가야만 본래의 신의 얼굴(visio Dei)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것을 향해 올라가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에게는 목표가 있습니다. 이 목표를 신이 아닌 '정신'이나 '세계 정신'으로 설정한다면 이것은 기독교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근대인의 새로운 종교라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는 철학과 신학, 종교의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지점입니다.
(...)
마지막으로 <철학의 원리>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76번입니다. 신적인 것에 관해서는, 신성한 권위에 근거를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신성한 믿음이 어떠한 계시도 내리지 않는 것들"은 신적인 것과 관련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우리 인간의 이성의 힘만을 가지고 원초적인 측면부터 검토해 들어가야만 합니다. 신성한 권위를 우위에 두어야 하지만, 신이 계시하지 않은 것들, 즉 신성한 권위와 관계 없는 것들은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말입니다. 데카르트는 신에 의존하면서도 인간이 할 일을 명료하게 제시합니다. 그의 형이상학은 그런 점에서 신적이면서도 인간적입니다. 근대 형이상학의 출발점은 바로 이러한 이중성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8강 : 참과 거짓을 식별하는 정신, 정신과 신체의 합성체로서의 인간(제4성찰, 제6성찰)

"데카르트에서는 '완전한 존재인 신의 관념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이 나의 유한성을 자각하게 합니다. 그러면 신은 이제 완전 개념이 아닙니다. 유한자의 대개념對槪念, 즉 유한자에 대립해 있는 개념이 되어 버렸습니다. 내가 자기의식을 가질 때에만, 즉 초월론적으로 나를 자각할 때에만 신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조건적인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근대인의 숙명일 것입니다. 인간은 초월론적인 만큼만, 꼭 그만큼만 초월적일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신에 가 닿으려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을 향해서 경건하게 추구해 나아가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자기의 유한성을 자각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데카르트는 '안심'에 이르렀지만 그것은 잠깐일 뿐입니다. 다음 순간 그는 또다시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해야만 할 것입니다.
(...)
데카르트 형이상학에서 자기는 신이 매개하여 성립한다는 점에서는 미완의 자기인데, 그 미완의 형이상학을 완성시키려면 신을 폐기시켜야 합니다. 자기가 철저하게 자기로서 세계와 대면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에서는 신을 매개로 삼지 않으면 타자와 자기가 세계 지평에서 만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데카르트 이후의 형이상학 기획들은 인간 세계에서 타자와의 만남과 통일을 만들어내기 위해 신을 폐기하는 기획으로 가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근대 형이상학은 무신론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7강 : 인간의 유한성에 의거하는 신의 무한성 증명(제3성찰)

"데카르트는 이 정신의 통찰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나는 이 정신(cet esprit) 자체, 즉 나 자신"인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자립적 자기, 자기의식입니다. 일체의 외부 대상 세계로부터 감각 데이터를 완전히 차단한 선험적인 자립적 자기의식이 성립한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나면서부터 역사적 경험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절대적인 선험적 자립적 자기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몰 역사적인 출발점을 확보하고자 합니다. 모든 역사적인 사태 이전에, 그 어떤 경험에도 물들어 있지 않은 순정한 사유 지점을 확보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정한 사유 지점을 이론적으로라도 자기 머릿속으로 확보하면, 그 순간 그 인간은 순정한 존재인 신과 맞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데카르트의 자립적 자기의식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여 데카르트는 아주 순정純正/純情한 '자기'를 확보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6강 : 자립적 자기의식의 현존, 정신의 우선성(제2성찰)

"데카르트는 제1성찰의 둘째 부분에서 "감각으로부터 혹은 감각을 통해서"받아들인 앎을 부정합니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겨냥한 것입니다. 예전의 '나'는 감각에 의존하였고 감각은 신체에서 생겨납니다. 이 감각의 속박을 끊는 것이 데카르트의 목표입니다. 그러면 신체에서 오는 것을 끊어야 합니다.  끊은 다음에는 정신에만 의존하여야 합니다. 신체와 정신을 분리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감각으로부터 알게 된 것 가운데는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것도 많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감각에서 얻은 것을 의심하는 나'와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아는 나'는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는 데카르트의 내면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자아들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꿈을 꾸고 있는 나'와 '현실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나'의 대화로까지 이어집니다. 이 대화는 결국 의심의 극한에 이르게 되어 악령이 등장하는 단계에 이릅니다. 악령은, 내가 사실은 신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러한 것처럼 만드는 힘입니다. 이로써 데카르트는 방법론적으로 신을 배제합니다. 그렇게 되면 의심하는 나는 철저하게 "난국의 암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1성찰의 성과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5강 : 감각적 앎의 부정, 철저한 의심(제1성찰)

"이렇게 보면 <성찰>의 핵심은 제3성찰입니다. <성찰>은 제3성찰을 가운데 놓고 대칭되는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3성찰의 분량이 많습니다. 신존재 증명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내용상 핵심은 나의 지성, 즉 나의 영혼, 나의 이성적인 사유, 자립적 자기의식이 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논하는 부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정신을 뚜렷하게 아는 힘을 가지는 자만이 신을 아는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제 3성찰의 핵심 테제이자 <성찰> 전체의 핵심 테제 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이라고 하는 완전한 존재가 있어야 불완전한 존재인 나의 자기의식이 성립한다고 말하는 듯하나, 역설적이게도 내가 나의 불완전함을 자각할 때마다, 바로 그때에만, 신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신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의식을 정립한 사람만이 신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자각적 자기의식에 의한 자립인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4강 : <성찰>의 구성과 목적

"..."사유의 존재", 즉 인간 정신의 현존, '사유하는 존재, 사유적 존재(res cogitans)가 데카르트 철학의 제1원리이자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 1원리인 사유하는 존재, '내가 아는 것', 나의 '자기의식'으로 아는 것이 진리 인식의 원천 또는 근원입니다. 이것은 헤겔이 말한 "이성으로부터 나온 자기의식의 자립적 철학"입니다. 내가 알아야 신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있다 해도, 그 신이 진리의 원천이라 해도 그 진리를 알 수 있는, 진리 인식의 원천인 '자기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 자기의식이 데카르트 철학의 출발점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3강 : 진리의 원천과 진리 인식의 원천

"헤겔은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이 진리의 본질적 계기이며, 데카르트는 이성으로부터 자립적으로 등장하는 철학의 출발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실상 철학에 관한 헤겔의 규정이기도 합니다. 헤겔이 여기서 말하는 이성(Vernunft)은 인간의 이성이고, 그것은 자연의 빛이기도 합니다. 철학은 이러한 이성으로부터 자립적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알고 있는 자기의식이 진리의 본질적 계기라는 것입니다. 이 자기의식은 신과의 존재론적 의존관계를 끊어낸 자립적 자기의식입니다. 여기서 헤겔이 말하는 이 자기의식은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자기'입니다. "나는 생각한다"의 그 '자기'입니다. '내가 생각한다는 것'이야말로 진리의 본질적 계기임을 알고 있는 철학은 자립적 철학입니다. 이 철학은 신학과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린 것이고, 그 자립적 철학에 착수한 사람이 데카르트입니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은 자립적 자기에서 시작합니다. 헤겔이 보기에 데카르트는 그것을 끝까지 밀고가서, 그것으로써 인간 이성의 철학을 구축했습니다. 헤겔이 보기에는 이것이 근대 철학입니다. 철학의 근대성은 바로 이 자립적 자기의식에서 성립합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2강 : 자립적 자기의식, 데카르트 철학의 근대성

"사람은 누구나 공부를 할 수 있는 소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호기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공부를 하고 어떤 이는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가지고 설명해보면, 공부를 하지 않는 이는 공부의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르고자 하는 지점, 목적이 없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부에 관한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해야 할 사람을 움직이는 힘, 즉 목적입니다. '공부는 왜 하는가'부터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
측정 가능한, 작용하는 힘만 그때그때 정확하게 측정해서 그것만 운동이라고 하자는 사람들도 있겠는데 그들은 바로 근대의 물리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운동 개념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음이 무의미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궁극원인을 묻는 것이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
지성은 대상을 "접촉"하고 "포착"함으로써 대상을 수용합니다. 이를 통해 지성은 "사유대상을 소유"합니다.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로써 대상은 지성의 소유가 되었고, 대상은 폐기되었습니다. 이것은 대상이 사유로 지양(Aufheben)된 것입니다. 대상이 대상이기를 그치고, 즉 대상이 대상성을 폐기하고 정신화(Begeisterung)된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가 가진 대상성을 폐기하고 이렇게 자신의 사유 속으로 가지고 와서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새계 전체를 정신화하여 그것을 자신의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입니다. 인간이 이런 존재가 되면 신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신화神化입니다. 지성은 이러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적인 것'이며 '최후의 사유'이며, '이론적 활동'입니다. 헤겔은 <철학백과> 마지막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테오리아theoria를 인용하면서 '사변'(Spekulation)이라고 번역합니다. 헤겔은 이것을 사변적 사유로 이해한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1강 : 운동론, 가능태와 현실태

"자기가 다른 것과 구별되려면 자기의 규정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자기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자기동일성을 확보하려면, 즉 타재와 구별되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면, 내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내가 무엇이 아닌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훌륭함을 계속해서 유지하려면, 사실은 훌륭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닌 것을 아는 것은 사유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유는 무엇일까요. 갑자기 '이것' 안에서, 정해진 존재 또는 규정적 존재 안에서 의문이 생겨나 '이것'이 속해 있는 유類, 즉 '무엇'으로 한 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에서 '무엇'으로 올라가는 것, 즉 상승입니다. 플라톤 <국가>의 동굴의 비유를 보면, 동굴에서 벽면을 보고 있던 이들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밖을 향해 갑니다. 그 까닭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동굴 벽을 보고 있던 이들은 정재의 상태에 있던 이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동굴 안을 보고 있는지, 동굴 밖을 보고 있는지, 그곳이 본래 환한지 환하지 않은 것인지 모릅니다. 벽면만 계속 보고 있으면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고개를 돌려서 밖으로 나가봐야 알 수 있습니다. 동굴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은 자신이 있던 곳이 어떠한 곳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동굴 벽면만 보고 있던 '이것'(tode ti)의 상태에서 동굴 밖의 '무엇'(ti esti)으로 나아가는 것은 자기 바깥으로 나가는 것, 자기외화自己外化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0강 : 실체론, '이것'(tode ti)과 '무엇'(ti esti)


"첫째가는 것을 탐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이 탐구해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보편적 존재론과 첫째 철학의 영역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심연이 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여기에다 '갑자기'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편적 존재론을 탐구하면 건강 자체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처럼 탐구하면 학이 성립하지 않고 신비주의가 된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지금 보편적 존재론을 끝까지 밀고가면 첫째 철학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편적 존재론과 첫째 철학을 '하나와의 관계'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
첫째로 있는 것을 다루는 학문은 첫째 학문(첫째 철학, prote philosophia)이고 그것은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보편적 존재론 위에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해서 보편적 존재론이 신학의 하위 학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보편적 존재론이 없다면, 신학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학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보편적 존재론과 신학은 상호포섭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보편적 존재론과 신학의 관계, 하나와 여럿의 관계 문제에 대한 해명입니다. 이 문제는 '형상이 내재해 있는가 아니면 따로 있는가'에서 생겨났습니다. 플라톤은 형상이 따로 있다고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직면한 난문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9강 : 학의 성립에 관한 물음, 보편적 존재론과 신학의 관계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형상론에서 가장 심각하게 제기하는 질문이 이것입니다. 그 사물을 그 사물이게 해주는 것은 형상인데, 그 형상이 어떻게 그 사물 밖에 따로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형상은 그 사물 안에 있어야 합니다.이것이 우리의 상식에 부합한다 할 수 있습니다. 
(...)
'사물과 따로 떨어져서 사물 외부에 실체인 형상이 실제로 있다', 이것이 플라톤의 입장이라고 정리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이 사물들의 실체이려면 그것이 사물들과 분리되지 않고 사물 안에 있어야 한다는 형상내재론을 주장하려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형상(외부)실재론, 형상시원론, 형상내재론, 이렇게 형상에 관한 세 가지 입장을 알게 되었습니다.
(...)
그런데 이 실체적인 것이 특수자들 안에만 들어 있다면, 특수자들이 생성 소멸함에 따라 그것도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실체는 특수한 것들에 내재해 있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특수자 안에 내재해 있음과 동시에 그 생성 소멸의 변화를 겪고 있는 특수자와 분리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형상이 특수자에 내재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분리되어 있다고 하면, 특수자와 형상의 관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형상은 특수자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특수자 밖에 있을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학이 성립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형상의 내재와 분리에 관한 아리스토텔스의 물음', 더 나아가 '학의 성립 가능성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음'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8강 : 형상의 분리와 내재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학문의 출발점은 '놀라움'(thaumazein)입니다. 놀라움에서 시작된 학문의 영역에는 이론학, 실천학, 제작학,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앎이라고 하는 것은 감각적인 앎부터 시작해서 기억, 경험, 그다음에 기술이 있고, 논증적 지식(입증 가능한 지식)과 제일원리를 파악하는 직관적 지식이 있으며, 그 둘을 합한 지혜에 이릅니다. 거듭 말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감각지부터 시작하여 지혜에 이르는 과정은 누적적인 앎의 과정입니다. 대체로 보아서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가 감각지의 단계이고, 그다음이 경험과 기술의 단계이며, 마지막이 논증적 지식, 직관적 지식, 지혜의 단계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7강 : 앎의 종류와 단계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분명하게 이론학과 실천학과 제작학의 구별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이론학과 실천학이 엄밀하게 구별되는 것도 아닙니다...아리스토텔레스는 선과 악의 문제 등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달리 말해서 플라톤에서처럼 좋음의 이데아 등이 초월적으로 논의되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가치의 문제를 초월적으로 논의하지 않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6강 : <형이상학>의 구성

"플라톤은 개인의 영혼이 완성된다고 하여 좋음의 이데아에 이를수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좋음의 이데아를 탐구하기 위하여 논의의 범위를 정치적 공동체로 확장시켰습니다. 그는 좋음의 이데아의 파악이라는 이론적 작업이 정치적 공동체에서의 실천적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플라톤이 이 논의를 위해 제시하는 대표적인 논변은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등인데, 이들 비유에 제시된 설명을 통하여 우리는 좋음의 이데아가 모든 것의 궁극적 원리이며, 그것은 변증술적 논변의 힘에 의해서 파악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변증술적 논변의 힘을 가진 자는 철학적 통치자입니다. 철학적 통치자는 단순한 이론적 인식만을 가진 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다양한 직무를 통해서 실천적 삶을 겪은 자이기도 합니다. 철학적 통치자뿐만 아니라 인간은 '힘'(dynamis)을 가지고 있어서 상재相在, 즉 본질적 존재를 파악할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 즉 정재定在를 변경시켜야만 합니다. 상재의 파악은 이론이고, 정재의 변경은 실천인데, 이러한 이론과 실천, '실천을 통한 이론', '이론을 위한 실천'은 인간 개인이 아닌 정치적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좋음의 이데아를 중심으로한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이처럼 이론과 실천이 중첩되는 차원에 놓여 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5강 : 아는 것과 하는 것, 이론과 실천의 통일

"태양의 비유는 인간에게 참된 진리를 알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밝혔습니다. 선분의 비유는 그 참된 진리가 어떠한 단계를 거쳐가는 것인지를 논증하였습니다. 동굴의 비유는 누가, 어떤 방식으로 진리를 알아내는지를 이야기했고, 그렇게 알아낸 진리를 무지한 이들에게 가르쳐주는 실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동굴의 비유 첫머리는 교육이라는 실천을 암시하면서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4강 : 참으로 좋은 것에 관한 앎과 그것의 실천(동굴의 비유)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 세계에 대한 확실한 앎이 아니라 참으로 좋은 것에 관한 앎입니다. 이 앎의 대상은 배움의 최고 대상으로서의 '좋음의 이데아'(hē tou agathou idea)입니다. 이에 관한 논의가 <국가>에서 전개됩니다. 이것은 플라톤 형이상학의 핵심 논변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태양의 비유를 다시 정리해봅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잘 보려면, 즉 보는 힘을 가지려면 빛이 필요합니다. 빛은 어디서 옵니까. 태양에서 옵니다. 다시 말해서 태양은 보는 힘을 제공합니다. 태양은 가시계에 힘을 주는 원인이 됩니다. 힘(dynamis)인 태양 빛이 강할 때는 또렷하게 보입니다. 이것은 낮의 빛에서 보는 것이고, 빛이 약할 때는 밤처럼 어스름하게 보입니다. 대상은 같은데, 즉 같은 대상을 태양 빛으로 보는데, 그 강도가 다릅니다. 가시계가 작동하는 방식은 이러합니다.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은, 보는 장소가 다릅니다. 좋음이 주는 힘에 의해서 보는 장소가 다른 것입니다. 태양의 비유에서는 힘만이 서로 상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3강 : 참으로 좋은 것에 관한 앎(태양의 비유)

"<파이돈>의 형상 논변은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입니다. 인간이 확실한 앎을 가지기 위해서는 나면서부터 확실한 것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혼이 불멸해야 합니다. 인간은 불멸하는 이 영혼을 잘 단련해야 형상에 대한 앎을 가질 수 있습니다. <파이돈>에서 형상에 관한 논의는 인간의 영혼에 관한 논의에 부수적인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2강 : 같음과 같음 자체에 관한 논변

"소크라테스가 찾은 것은 '무엇'이고, 이것은 추론의 시작점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찾은 것은 불변의 실재가 아니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로고스들입니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귀납적 추론과 보편적 정의"라고 말합니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둘째 항해를 달리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학문의 시작과 관련된 것입니다. 일단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논의의 출발점을 찾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차선의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의미 규정이 된 말들(logoi)을 매개로 이성(logos)에 의해 존재하는 것들의 진리를 고찰 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증법(dialektiē)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1강 : 합의된 규약에 의지하는 '차선의 방법'

""올바른 무엇" 또는 "어떤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이것은 형상으로 짐작되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그것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을까요. 우선 그것은 실제로 있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저기에 진짜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상실재론입니다. 
(...)
이때 소크라테스는 "끊임없는 물음의 제기를 통해", "귀납적 논구"를 통해서 그 말의 "보편적 정의"를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만 비로소 논변이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논의의 출발점, 즉 학의 시원이고 이것을 형상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형상은 실제로 저기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논의를 위해 '의미 규정된 말들'(logoi)이 됩니다. 이것이 형상시원론입니다. 
(...)
좋음의 존재론(좋음의 논리학)이 성립할 수 있으려면 인간에게 우연적인 것이 결코 일어나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존재론과 논리학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타협책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좋음의 유형론일 것입니다.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상정하여 유형을 만들어놓고 그때그때 꿰어맞춰 보는 것입니다. 불변의 좋음이 있다면 그것의 법칙을 파악하여 좋음의 논리학을 만들고 그것을 예외없이 적용하면 될 것이지만, 좋음의 유형론에서는 이런 방식을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좋음의 유형론은 파라데이그마, 즉 잠정적 모형을 전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형을 만들어두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적용해야 합니다. '상황에 맞춰' 적절함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 능력은 일종의 본을 가지고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을 살펴보는 힘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렇게 살펴보는 힘은 본을 모방(mimēsis)하는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0강 : 형상실재론, 형상시원론

"<파이돈>의 표면적인 주제는 '혼의 불멸'이고, 혼의 불멸을 논증하기 위해서는 형상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는 동안 영혼을 잘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파이돈>에서는 실천적 차원에서 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