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지음), 천병희(옮김), <일리아스>, 도서출판 숲, 2007

1.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이 불멸하는 명예를 얻고자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인 헥토르나 아킬레우스 모두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이는 아마도 당시의 그리스인들에게는 보편적인 생각이었으리라. 실제로 모든 그리스 사람이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지 않았을지라도,  그 사회에서 가장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명예'였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바로 저것이 그 옛날에 용감하게 싸우다가 영광스러운 헥토르의 손에 죽은 그 사람의 무덤이지.'이렇게 누군가 말할 것이고, 그러면 내 명성은 불멸할 것이오. (7권 89행)  - 헥토르의 말

내가 이곳에 머물러 트로이아인들의 도시를 포위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힐 것이나 내 명성은 불멸할 것이오. 하나 내가 사랑하는 고향 땅으로 돌아간다면 나의 높은 명성은 사라질 것이나 내 수명은 길어지고 죽음의 종말이 나를 일찍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오. (9권, 412행) -아킬레우스의 말

2.
24편으로 이루어진 호메로스의 이 책은 수메르 지역의 '길가메쉬 서사시'를 제외하면 전해지는 것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서사시이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개 호메로스의 생몰연대를 기원전 8세기로 추정하고 있고, 고고학적 유적을 근거로 '트로이 전쟁'이 기원전 12세기에 발생한 사건이라고 한다면 대략 현재보다 3,200년전의 사건에 대해서 약 2,8000년 전에 정리된 이야기인 셈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묘사는 생생하고 사건의 전개는 압축적이다.  10년 동안의 전쟁 기간중 이 서사시에서 다루고 있는 부분은 불과 50일에 불과하며 그 중에서도 역병이 퍼지는 기간, 장례식 준비 기간 등을 제외하면 대략 열흘 남짓한 기간동안 벌어진 일들로 전체 사건을 보여주고 있다. 책 말미의 해제에 나오듯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23장에서 일리아스와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고 한다.

호메로스는 트로이아 전쟁을 전부 다 취급하려 하지 않았다. (...) 그는 전체에서 한 부분만 취했고 그 밖에 많은 사간들을 삽화로 이용하고 있다.

생생한 묘사의 예는 아래의 구절로도 충분히 설명될 것이다.

전에는 그의 몸을 파멸에서 구해주던 이 갑옷도 이때는 창에 찢어지며 메마른 소리를 낼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쿵 하고 쓰러졌고 창은 그의 심장에 꽂혔다. 그의 심장은 아직도 버둥대며 창대의 끝을 흔들었으나 (13권, 440행)

3.
책 말미의 해제는 작품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준다. 특히 호메로스의 인간관이 흥미있는 부분으로 '호메로스적 인간은 살아 있을 때가 아니라 죽고 난 뒤에야 비로소 영혼과 육체로 나뉘고' 그러므로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하나의 전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감정과 행동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지 않는 결과로 나타나는데 이럴 경우 '인간은 그의 행동과 일치하며 그의 행동에 의해 완전히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중적인 자아나 갈등하는 자아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들은 철저히 현세주의자들이기도 하다. '물질적 향락과 잔치, 술과 고기에 대한 욕망이 숨김없이 드러내며 '내세에 대한 어떤 기대도 갖지 않는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서사시의 영웅들은 그들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을 극대화해서 보여주어 '인간의 보편적인 가능성을 구체화한 원형'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한다. '네스토르는 훌륭한 노인의 원형이고 아킬레우스는 훌륭한 젊은이의 원형'이다. '그리스군의 총수 아가멤논은 왕자다운 태도를 보일 뿐 아니라 용모도 뛰어나게 수려하고, 테르시테스는 생김새도 못났을뿐 아니라 행동도 비열하다'고 한다.  '준족의 아킬레우스' 는 비가오나 눈이오나 심지에 막사안에 들어가 있어도 '준족의 아킬레우스'로 불린다.

4.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 영원히 살기 위해 무엇을 할까? 아이를 낳아 자신의 분신을 계속 이어가려 하고, 종교나 철학을 통해 현실에서의 죽음 이후의 삶을 준비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정녕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 고전을 읽어 우리의 필멸성을 확인하는 것이 고전의 유용함 중 하나라고 하겠다.

하지만 운명은 겁쟁이든 용감한 사람이든 일단 태어난 이상은 인간들 가운데 아무도 피하지 못했소. (6권, 488행) 

덧글

  • 9625 2010/01/04 04:43 #

    저는 아킬레우스가 훌륭한 젊은이의 원형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총사령관이 모욕 좀 줬다고 아군이 패배하기를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제우스에게 잘 좀 말해달라고 어머니에게 기원하는 모습을 생각하면......또한 아가멤논도 훌륭하다기보다는 비열하고 편협한 모습으로도 나온다고 봐요. 천병희 선생님 해설에는 그렇게 적혀 있기는 한데...아킬레우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영웅상'하고는 아무리봐도 다른 인물로 보여서 ^^
  • 여형사 2010/01/04 13:48 #

    강유원 박사의 강의를 들어보면 전반부에 나오는 아킬레우스는 철없는 아킬레우스, 후반부는 영웅 아킬레우스라고 설명하시더군요. 말씀하신것처럼 초반에는 정말 '찌질한' 사람으로 나오지만 파트로클로스가 죽은 후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명예'를 쫓는 모습은 그리스인이 생각하는 '훌륭한 젊은이'의 원형으로 삼아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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