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사회 참여에 대한 공정한 평가_민노씨의 강유원 관련 포스트에 붙여 잡담

1.
민노씨
의 [한량지식인:써머즈와의 대화2]에 언급된 강유원의 평가에 대해서 짧은 코맨트를 하려고 한다. 철학박사이자 꽤 유명한 서평가로 나의 '관심저자'중의 한명인데 민노씨와 서머즈님이 이 사람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셨다길래 그 내용이 궁금해져서 별도의 포스트를 부탁했다.

써머즈'한량'(閑良)이라는 표현을 쓰더라. 강유원은 한량이라는 거다. 진중권도 한량이고, 신해철도 한량인데, 강유원은 좀더 관조적이고, 피튀는 현실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둔 신선형 한량이고, 진중권은 좀더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투사형 한량이며, 신해철은 진중권과 비슷하긴 한데 내공이 좀 부족한 날라리 한량이다. 반드시 써머즈가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은 아니고, 내가 기억하기에 그런 취지라는 거다. (한량의 유래와 어원에 대해선 한국어 위키백과를 참조하시라.)

한량이라는 표현은 위 포스트의 후반부에도 언급되지만 '전적으로 비판적인 취지를 담은 조롱투의 표현'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럼 왜 한량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근거를 찾아보면 이러하다.

강유원은 적당히 사회 비판하고, 적당히 자신이 배운 걸로 먹고 사는 그냥 '한량 지식인'이다. 거기에 뭔가 대단한 것이 있다는 생각, 나 역시 없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강유원과 같은 소위 '대중 지식인'에 대한 민노씨의 당부(?)는 아래와 같다.

다만 소위 '대중적인 지식인'들은 조금 더 자신의 계급성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현실과의 간극을 조금이나마 좁혀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자신의 계급성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일이 어떤 것이지 좀 애매하긴 하다. 계급성이라 함은 결국 경제적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일 텐데 소위 대중지식인 (일반인에 대해 책을 쓰거나 강연하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는 사람들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들도 별 다를바 없는 소위 '프롤레타리아'에 속해있을 것이고 고용자가 없을 뿐 임금노동자와 별 다를 것 없는 (오히려 훨씬 혹독한) 경제적 상태를 갖고 있을 것임이 분명할텐데 어떤 것을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2.
위 포스트에 대해서 이렇게 별도로 언급한 것은 두가지 지점 때문이었다. 첫째는 강유원이 '적당히 사회 비판하고, 적당히 자신이 배운 걸로 먹고 살고' 있느냐는 fact에 대한 것이고, 두번째는 그러한 fact가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점이다.

적당히라는 것은 사실 주관적인 판단기준이라서 객관적으로 검증하기는 어려운 개념이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적당히' 비판하고 '적당히 먹고 살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가 쓴 책이나 서평을 살펴보자. 

연암이 졸지에 개그작가로 `열하일기` 장난해석에 씁쓸  (회사원 철학박사 강유원의 사서 읽은 책, 2004, 03)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창립자(?)로 알려져 있고 연암 박지원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고미숙씨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다. 본문 중에 보면, 

연암에게는 금기시한 것을 말한다고 하는 분명한 전선이 있었으나 고미숙의 염두에는 전혀 불온하지 않은,유쾌한 글을 원하는 타깃 독자만 있었을 뿐이다. 덧붙여, 나는 고미숙의 책을 통독한 뒤 내다 버렸다.

이 서평은 파장이 확산되어 이 책을 낸 그린비 출판사의 유재건 사장의 반박문이 실리기도 했고. 이에 대한 강유원의 재반박이 실리기도 했다. 사실 관계에 대해서 지금 논하기는 좀 어렵겠다. 하지만 이런 비판이 '적당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을까?

중앙일보 도올 김용옥 기자의 기사 (강유원의 북소리, 2007. 10)
김용옥을 엄청나게 '까는' 글이다. 그의 사실에서 기반한 기사 작성이 미비함과 더불어 철학자로서 기본도 갖춰지지 않음을 제대로 비판하고 있다.

위의 2가지 예는 그나마 학술적인 판단에 근거한 비판이다. 그래서 사회상에 대한 비판이 아닌 학술적 비판이므로 소위 '적당한' 사회 비판의 범주에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학술 비판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고대아테네의 흥망 ‘시장경제’로 설명 (회사원 철학박사 강유원의 사서 읽은 책, 2004, 08)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근거하여 시장과 경쟁이 오히려 낡고  실패한 개념이라는 설명과 , 이에 대한 기사를 옮긴 중앙일보 및 소위 386세대의 위 신문 기사를 작성한 이들을 맹렬히 비판하고 있다.
(그외의 강유원의 서평 링크)

이런 비판들이 적당히 비판하고 적당히 돈을 벌고 사는 사람의 행동이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가 사설 학원에서 중/고생들 논술을 가르친다고 하면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이미 철학박사인데다 그의 말빨(?)과 글쓰기 실력이라면 억대 연봉은 우습지 않을까? 사람에 대한 판단은 자유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 별다르게 간섭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근거가 분명하지 않은 비판에 대해서는 그에 대응한 논평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혹시 내가 언급한 것 이외의 다른 요인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

3.
혹시 책을 쓰거나 서평을 쓰는 행위 자체가 '적당한' 사회 비판인 것일까? 말하자면 사회 단체를 조직하거나 혹은 직접적인 사회 참여를 하는 것만이 '적당하지 않은' 사회 비판과 사회 참여라는 것일까? 이 부분을 설명하는 것이 앞서 언급한 두번째 부분 - 대중지식인의 활동의 의미-에 대한 답이 될 것 같다.

나는 이런 활동이 전혀 '적당한' 수준의 사회 비판이 아닐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사회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비난을 하기는 쉽지만 제대로된 비판을 하기는 어렵다. 또한 그 비판을 근거를 갖고 체계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꾸준히 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시대에 이명박의 정책에 대해서 일시적인 비판을 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처럼 장관 인사의 문제를  '지대추구의 문제' 로  비판하거나 정부의 정책 기조를 '히틀러가 사용한 정보전염병' 개념으로 비판하기는 쉽지 않다. 

또한 여름/겨울에 하는 일선 교사대상의 인문학 강의, 시민단체 대상의 강연 등을 보면 비록 생계를 위한 측면도 분명히 있겠으나 '우리 국민이 Low information voter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한명의 박사가 필요한 것이 아닌 모든 국민들이 책을 보고 더 똑똑해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과 그에 대한 분명한 실천도 눈에 보인다. 이외에 또 어떠한 실천이 있어야 '적당하지 않은' 실천이 될까?

제목처럼 지식인의 사회 참여에 대해서 그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함(책, 서평, 강연)만으로도 그 의미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강유원은 내가 생각하는 지식인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좀 길게 포스트를 올렸다. 한사람의 자연인에 대한 인물 비평 이전에 소위 대중적 지식인 (이 개념도 좀 모호하긴 하다. 공병호도 대중적 지식인에 들어갈까?)에 대한 글이라고 봐주셨으면 한다.

덧.
1. 이 포스트는 강유원의 인물 비평이 아닙니다. 인물비평을 할 만큼 아직 그를 잘 알지 못합니다. 이해를 위해 제가 읽은 강유원의 책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서-
몸으로 하는 공부 (2005)
장미의 이름 읽기 (2004)
주제(2005)
책과 세계(2004)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2006)
서구정치사상고전읽기 (2008)

-번역서-
달인(2007)
경제학 철학 수고 (2006, 끝까지 읽지는 않음)
인문학 스터디 (2009, 공저)

2. 이 포스트는 민노씨의 [한량지식인:써머즈와의 대화2]에 대한 답포스트입니다. 고맙게도 저의 댓글에 대한 포스트를 별도로 올려주셨네요. 감사합니다. ^^

덧글

  • 서울비 2009/07/16 12:34 # 삭제

    민노씨의 글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 글을 통해 더 넓게 보고 갑니다.
    의견 공개해주셔서 감사해요
  • 여형사 2009/07/17 10:34 #

    별 말씀을요...
  • silent man 2009/07/22 00:30 # 삭제

    무려(?) 회사원 '철학' 박사라는데 정작 철학을 전공한다는 전 강유원씨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니, 손발이 오그라들며 얼굴이 붉어집니다.
    OTL
  • 여형사 2009/07/22 10:58 #

    철학 전공이시라니 갑자기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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