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리클레스 외(지음), 김헌 외(옮김), <그리스의 위대한 연설>, 민음사, 2015

플라톤은 엄밀한 학문 탐구의 방법론을 확립하고자 개연성만을 담보하고 있는 의견(doxa)은 진리 자체가 아니라 단지 '진리 닯은 것'일 뿐이라 주장하며, 오직 정신의 힘으로만 탐구할 수 있는 이데아만이 참된 것이라는 진리이원론을 주장하였다. 이에 기반하여 '개연성과 시의적절성'이 중시되는 수사학(rethorike)은 그저 소피스트들이 사적인 돈벌이를 위해 발전시킨 것이지 학문 탐구를 위한 엄밀한 방법론은 아니라 폄하하였다. 

이에 비해 플라톤과 동시대인이자 당대에는 플라톤보다 훨씬 높은 사회적 인정을 받았던 이소크라테스는 현명한 생각(eu phronein)을 통해서 상황에 합당한(eikos) 추론을 통해 의견을 얻는 일, 즉 플라톤은 그저 개인적인 견해라 생각한 의견(doxa)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인식이라고 생각했으니, 그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존재나 그것에 대한 앎이 인간에게는 접근이 허락되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소크라테스의 철학 개념은 적기를 파악하고 적기에 맞춰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현명함과 수사적인 능력이었으니, 그에게 '철학하기'란 시의적절(kairos)한 의견(doxa)을 구성하기, 그리고 그 의견을 말(logos)로써 전달하고 설득할 수 있는 지혜를 추구하기, 그리고 그런 능력을 교육하기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렇다면, 플라톤과 이소크라테스의 철학개념 사이에는 상호 소통이 불가능한 심연이 놓여있는 것인가. 표면적으로는 플라톤이 직접적으로 비난했던 소피스트의 방법론이 수사학이었으므로 둘 사이에는 심대한 차이가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진리 탐구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로 보았던 적절함 혹은 적도 역시 이소크라테스의 시의적절함과 사실상 같은 개념이라 볼 수 있으니, 플라톤은 인간이 닿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관념의 세계를 추구해야할 모형으로 상정하였을 뿐 실제적으로는 이소크라테스와 같은 '상황에 따른 현명한 판단'이라는 진리 개념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플라톤 철학이 오로지 철학적 실재에 대한 초월적 이념의 성취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소크라테스가 생각한 실천적 지혜의 추구와도 일정부분 겹쳐진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측면에서 서양철학의 역사에서 플라톤이나 데카르트 이후 논리 실증주의적 태도에 의해 철저히 배격되어온 수사학의 전통, 이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르네상스 시대 단테의 상징 활용에 의해 계승되었고 카시러 등의 상징해석끼지 연결된 이러한 수사학의 전통은 사상사 혹은 실천학의 측면에서 다시 검토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잡담 잡담

93년에 고향 떠나왔으니 이제 23년 지났다. 군대 시절 빼더라도 대략 마흔번 쯤의 설과 추석을 지내러 대전에 갔다온 셈이다.

그 세월동안 기어 다니던 조카들은 이제 대학 졸업반이 되었고, 30대 팽팽하던 사촌형님은 50대의 장년이, 50대의 부모님은 70대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물론 10대의 나도 40대의 아저씨가 되었다.

내가 각별히 아끼는, 큰 조카와 취업 상담을 하면서 아무리 커도 어려서 얼굴이 다 큰 얼굴에 들어있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났다. 자식을 키워본적이 없어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이 녀석을 보니 무슨 말인지 알겠다. 이런 저런 사정이 녹록치 않으니 취업 사정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알겠기에 마음이 더 쓰이고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저 생물학적으로 유전자의 일부가 유사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알버트 허쉬먼(지음), 강명구(옮김), <떠날것인가, 남을것인가>, 나무연필, 2016

기업이나 조직의 성과 하락은 해당 기업이나 조직의 상품이나 서비스 품질의 절대적 혹은 상대적 저하로 나타난다. 이때 경영진은 두 가지 우회로를 통해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1) 고객이 더 이상 기업의 제품을 구매하지 않거나 회원이 조직을 탈퇴한다. 이것이 이탈 Exit 방식이다. 그 결과 이윤이 하락하고 홰원수가 줄어든다. 
(2) 기업의 고객이나 조직의 회원은 경영진 혹은 상부 기관에 직접 불만을 알리거나 여러 방식을 통해 이를 관심 계층에 전달한다. 이것이 항의 Voice 방식이다. 

어떤 조건에서 이탈 방식이 항의 방식보다 혹은 항의 방식이 이탈방식보다 나은가. 일률적인 답은 없다. 다만 민족, 국가 등 공공재의 성격을 띠고 있을 때는 이탈 방식이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이탈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안되고 항의 방식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또한 공교육과 같이 이탈하더라도 그 품질의 하락에 궁극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제품이나 서비스의 경우 경쟁을 통해 쉽게 이탈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품질 하락을 막을 수 있는 항의자들이 쉽게 이탈하게 함으로써 전체적인 사회의 후생 수준을 낮출 수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아울러 이탈과 항의 방식이 모두 가능한 경우 항의에 따르는 제반 비용을 감안했을 때 이탈을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공교육의 예처럼 삶의 질로 개념화된 다수의 기본적인 서비스의 질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항의 방식이 특히 중요하다. 

한편으로 약간의 아탈이 가능할 때보다는 고객이나 구성원이 선택의 여지없이 묶여 있을 때 항의 방식이 좀더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다. 중남미 독재 국가에서 반정치적 세력의 방명을 자유롭게 허영하는 것은 항의 세력의 이탈을 쉽게 하여 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경쟁 체제는 흔히 예상하듯 독점을 억제하기보다는 말썽 많은 고객들을 제거함으로써 부담을 덜어주는 경우가 많다. 

이탈 + 항의 : 자발적 결사체, 경젱적 정당, 소구 구매자를 대상으로 제품을 판매하는 기업
이탈 only : 고객과의 관계에서 경쟁적인 기업
항의 only : 가족, 종족, 국가, 교회, 전체주의가 아닌 일당 지배적 정당 
둘다 아님 : 전체주의적 단일 정당, 범죄 조직 

내가 공부하는 방법, 강유원 수업


내가 학생인 건 알겠는데, 그런 자각은 선생님의 존재가 전제될 때에야 가능하니 이는 학생임이 완벽하게 내재화되지 않았기 때문이겠다. 이처럼 선생님이 내준 숙제하듯이 공부를 하고 있는 나는 선생님들이나 펼칠 수 있는, 원리와 결말이 뚜렷하게 들어맞는 <길>을 찾아낼 수 없고, 내 머리 속을 채우기도 급급한 터에 <우리>의 공부 법까지 밝혀낼 수도 없다. 그래서 부탁 받은 제목인 <우리 공부의 길을 찾아서>를 <내가 공부하는 방법>이라고 제멋대로 바꾸어버렸다. 

내가 공부하는 방법은 나의 선생님께 배운 바와 그것을 어줍잖게 응용해서 덧붙인 몇 가지다. 덧붙였다고는 하나 그것도 공부 그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공부 외적인 것인데, 그건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세계가 조금은 다른 탓에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에 해당하는 걸 두서없이 늘어놓아 보려 한다. 



공부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두말할 것도 없이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다.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을 분별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는 학문적 업적이나 주위 사람들의 평판을 참고해서 선생님을 찾게 된다. 그러나 이는 지도 교수를 고르는 방법이지 선생님을 찾는 방법은 아니다. 선생님은 지도 교수 이상의 그 무엇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고작 지도 교수 고르는 법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다. 

교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교수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바를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자. 강의를 성실하게 하는 교수. 개념을 철저하게 따져서 강의하는 교수. 무슨 일이든지 원칙대로 처리하는 교수. 자신은 늙은이면서도 일 학년 학생에게도 반말하지 않는 교수. 리포트를 써내면 빨간 펜으로 고쳐서 되돌려주는 교수. 어떤 일이 있어도 학점을 고쳐주지 않는 교수. MT도 공식 행사라면서 반드시 참석하며, 그것도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가는 교수. 이렇게 처신하는 교수는 강의 시간에 늦게 들어와서 일찍 나가는 일도 없고, 무슨 보직을 맡을 겨를도 없으며, 어디에 잡문을 쓸 여가도 없고, 텔레비전에 나갈 시간도 없고, 정치에 돌릴 눈은 더욱이나 없다. 이런 교수가 있다면 계속해서 강의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빨아들여야 한다. 이런 원칙주의자는 스스로에게 엄격한 나머지 작년에 한 이야기를 또 하는 경우가 없으며, 말을 옮겨 적으면 그대로 문장이 되는 수가 많으니 공책에 적어 두면 더할 나위가 없다. 

이런 교수에게 공부를 배우면 어떤 점이 좋은가? 우선 개념 따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철학은 개념의 학이니 그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철학만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개념을 알아야 처리할 수 있다. 이것부터 시작하지 않는 사람에게 공부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두번째로 원칙대로 처리하는 걸 배울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뒤죽박죽 되어도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는 제자리로 되돌아올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원칙 지키기를 기업가에게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아무리 어린 사람이어도 존중해야 한다는 걸 배울 수 있다. 세상은 나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능력과 인격으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국 제대로 된 삶의 기초라는 걸 배울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공부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서도 기본이다. 공부를 계속하지 않을 사람도 배워두어야 하는 것들이다. 

지도 교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그것 또한 지도 교수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바를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도 구체적으로 나열해 보자. 지도 학생에게 잔심부름시키지 않는 교수. 자기가 쓴 논문을 자기가 타이핑하고 편집까지 하는 교수. 출판사에서 넘어온 교정본을 자신이 교정보는 교수. 새로울 것도 없고, 치열함은 더더욱 없이 사교장으로 변해버린 학회 따위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 교수. 대학원 수업 시간을 꽉 채우고 끝내는 교수. 고전만 붙잡고, 세월 가는 것도 모르고 그것만 읽히는 교수. 논문 주제를 상의하면 <알아서 써보라>고 하는 교수. 막상 논문을 써 가면 주격 조사나 접속사부터 따지는 교수. 논문 인용문의 원전을 죄다 찾아보고 잘못된 번역과 적절치 않은 인용을 지적해 주는 교수. 이렇게까지 해놓고도 <지금까지는 문장 연습과 논문 쓰기 연습이었으니까 이제부터 주제를 잘 정하고, 본격적으로 써보라>고 한마디 툭 던지는 교수. 자신이 정한 기준에 합당치 않으면 아무리 여러 학기가 지나도 결코 논문을 통과시켜 주지 않는 교수. 같은 주제에 대해서 자신이 가진 견해와 달라도 학생의 주장이 논리적이면 인정해 주는 교수. 자신에게 박사 학위를 받은 학생에게 다른 학교 강의 하나 알선해 주지 않는 교수. 아무리 오랜 세월을 공부해도 두 사람의 거리가 딱 그 만큼에 멈춰 있게 하는 교수. 

이런 교수가 있을까 마는 부지런히 찾아보면 있을 거다. 자기가 다니는 학교에 없으면 다른 학교에서 찾아보고 한국에 없다면 외국에서 찾아보자. 외국에서 그런 교수를 만났으면 계속해서 거기서 공부를 하고 한국에 오지 말자. 예를 들어 외국에서 학위를 받았다 치자. 그 뒤로 그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공부 성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말에 심정적으로 수긍이 되지 않는다. 지도 교수가 뭐라 하면 모를까. 또 자기가 쓴 글을 지도 교수가 언제든지 읽어볼 수 있다면 공부를 대충하고 글을 적당히 쓸 수가 없다. 그런데 학생은 한국에 있고, 지도 교수는 외국인이어서 외국에 있다면 어떨까? 무서울 게 없다. 아직도 먼길을 가야 할 사람이 게을러지고 망가지기 십상이다. 

하여튼 이런 지도 교수 밑에서 공부를 배우면 어떤 점이 좋을까? 공과 사를 분명하게 하는 법을 배운다. 공부하는 사람들 세상도 일종의 사회여서 쓸데없는 인간 관계가 많은 것을 좌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걸 딱 잘라 버릴 수 있는 뱃심이 생긴다. 고전만 붙잡고 앉아서 공부를 했으니 기본이 튼튼해진다. 게다가 단어 하나, 문장 하나도 소홀히 읽는 일이 없게 된다. 무슨 문제든지 자신이 알아서 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진다. 서양의 철학을 공부했어도 결국 그걸 풀어내는 건 우리말을 통해서인데, 문장 쓰는 훈련을 하므로 자신의 언어로써 생각하고 말하는 힘이 길러진다. 이러다 보면 외국의 책을 번역해도 우리말이 안 되는 번역을 하게 되질 않는다. 공부 가르쳐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을 안 써주니까 학생도 자연히 쓸데없는 데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하는 습성이 생긴다. 



공부하는 데 제일 좋은 건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일이지만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므로 선생님 없이도 공부하는 방법을 생각해 둘 필요가 있다.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면 훌륭한 학생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지만 이런 노력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젠가 20년쯤 경력을 가진 디자이너를 만나서 <비법>을 물은 적이 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베껴라>였다. 베끼라니, 표절을 하라는 말인가? 그런 뜻은 아니었다. 초보자가 대단한 걸 만들어보겠다고 덤벼봤자 땀만 빼고 시간만 낭비되니 잘된 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해보는 일을 되풀이해야 기본을 익힐 수 있다는 거였다. 똑같은 물체를 두고 그대로 그린다 해도 그리는 사람마다 그림은 다르다. 초보자가 내놓은 그림과 숙련자가 내놓은 그림, 대가가 내놓은 그림은 아주 다르다. 어떤 대가의 그림은 전혀 엉뚱하기까지 하다. 그러면 그 대가는 처음부터 그런 엉뚱한 그림을 그렸을까? 그건 아니다. 그는 수없이 많은 데생을 했었다. 

철학 공부도 마찬가지다. 철학 공부에서 베끼는 것은 철학사를 여러 차례 읽는 것이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이문출판사)가 너무 두껍다면 얇은 것이라도 골라서 열심히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다. 베끼기를 할 때는 베낄 책을 잘 골라야 한다. 일테면 서양 근대철학사를 공부하려면 최소한 코풀스턴의 철학사를 잡아야 한다. 

철학 공부를 베끼기에서 시작하라니 의아해할 수도 있다. 철학사 따위는 무시하고 <내 철학>을 하겠다고 나선다면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그러나 베끼기 없이 <내 철학> 해봤자 남는 건 처치할 길 없는 거만과 아무런 맥락 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현란한 단어들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철학을 공부한 사람조차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지껄이기 마련이고 남들이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자신의 철학이 그만큼 심오하기 때문이라는 도취에 빠지며 급기야는 도사가 된다. 이런 도사들은 기본적인 데이터베이스가 부족하기 때문에 자신이 접하는 모든 문제를 자신이 읽은 몇 안 되는 책 속에 나온 말로만 설명할 뿐이며, 세상의 모든 문제를 자기가 좋아하는 학자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려 한다. 이런 도사는 철학 공부하는 사람 중에만 있는 건 아니다. 

하여튼 철학사를 50번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죽 읽으면 철학의 기본적인 문제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 왔는지를 알게 되어 맥락이 잡히는데 이쯤에서 그걸 가지고 뭘 해보겠다고 나서면 안 된다. 아직 베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철학의 제문제}(벽호)처럼 주제별로 다룬 책을 읽는 것이다. 이 책은 철학의 근본 문제들을 정확한 문맥 속에서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주제에 관련된 철학자들의 원전을 부분적으로 정확하게 번역하여 덧붙여 두었기 때문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런 책도 50번은 되풀이해서 읽어야 한다. 철학사를 읽든 철학의 제문제를 읽든 주의할 점은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어야 한다. 누가 중요하다고 하는 부분만 읽어서도 안 된다. 그 사람에게는 그게 중요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중요한지 아닌지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읽다 보면 자기 맘에 드는 학설이나 학자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맘에 드는 사람이라 해도 그가 모든 문제에 대해 답을 내주는 건 아니다. 그 사람의 학설은 수많은 대답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무덤덤하게 대하지 않으면 그 학자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이건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라 신앙인의 자세이다. 

베끼기는 초심자 시절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에 걸쳐 해야 한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한 사람들은 더 이상 철학사를 읽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공부에 있어서 균형을 무너뜨리게 된다. 한 분야, 한 시대만 파고들다 보면 그것만이 중요한 것처럼 여겨져서 철학의 전 분야에 대해서는 무심해지기 마련이다. 입만 열면 플라톤만 이야기하고, 술에 취했어도 헤겔만 떠드는 건 광신자지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베끼기는 독학이 가져다주는 폐해도 막아준다. 독학하는 사람은 어떤 분야의 책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기 마련이다. 역사적인 연관이나 주제의 관련성에 유의하지 않고 읽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그 결과 아는 게 많아져서 장광설을 쏟아놓는다. 게다가 그들은 최근의 것what's new에 대한 관심도 지대해서 항상 시대에 맞춰 살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그 분야에 대해 체계적으로 글을 써보라고 하면, 장광설은 사라지고 말을 더듬게 되며, 그 점을 지적하면 원래 제대로 된 공부는 체계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우격다짐을 하곤 한다. 언뜻 듣기에는 옳아 보이나 <학>이라는 게 <체계적 지식>이라는 말인데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많은 사례를 들어가며 대중의 수준에 걸맞게 성교육을 잘한다 해도 그는 성의학자가 아니며, 자장면을 아무리 많이 팔았다 해도 그는 경영학자가 아니다. 어쨌든 베끼기를 거치지 않은 독학은 시간 낭비, 지적인 허영일 뿐이다. 

베끼기를 열심히 하다 보면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을 체득하는 이점이 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공부를 한다면 대개는 참고문헌 목록을 작성하고 이 책 저 책 들춰보면서 노트에 정리한 뒤 끝내는 것이 가장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그 어떤 책도 기억에 남지 않고 문장 몇 개만 막연한 추억처럼 머리 속을 둥둥 떠다닌다. 차라리 가장 표준적인 책을 한 권 정해서 모든 말과 문장을 따져가며 끝까지 읽는 게 낫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는데 막상 실천하려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남들보다 참고문헌을 적게 읽으면 뒤떨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이거 한 권 읽다가 새로운 것을 놓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 따위가 엄습하는 것이다. 이런 걱정과 불안이 생겨나는 것은 베끼기를 통해 축적한 기본이 없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사를 충실히 읽은 이는 철학의 문제가 그렇게 쉽게 풀리는 건 아니며,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관점이 생겨나는 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베끼기를 열심히 하는 건 기초를 다지는 일이다. 기초가 다져졌으면 구체적인 자기 공부에 들어갈 차례다. 도대체 무얼 공부할 것인지, 다시 말해서 무엇을 주제로 삼을지를 결정해야 한다. 주제를 선택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인데도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어떤 이는 그걸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어리석은 짓을 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서 공부 주제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던 문제여야 한다. 실존적인 차원에서 고민해 본 문제를 다듬어서 철학적 주제로 삼는 것이다. 별로 해주는 것 없이 규제만 하고 세금만 잔뜩 걷어 가는 국가가 못마땅했으면 국가론을 주제로 삼아보는 것도 좋다. 자기가 만나는 사람마다 죽어나가는 게 이상했다면 존재와 무의 문제를 주제로 택해도 될 것이다. 주제를 이런 식으로 정하지 않고 요즘 유행하는 거, 남들이 하는 거 붙잡아서 공부하다 보면 유행이 지나서 말짱 헛것이 될 수도 있고, 남들도 다 아는 이야기만 하게 될 수도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공부는 얼마 가지 않아 흥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과 따로 노는 공부가 가면 얼마나 가겠는가? 자기 스스로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주제를 가지고 남을 얼마나 설득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흥미가 떨어지면 최신 이론 들춰서 적당히 요약 정리한 논문이나 쓰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 그 논문의 내용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어떤 시사점을 주느냐고 묻는다면 <철학은 본래 메타 학문이므로 구체적인 현실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고상한 대답을 하게 된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다. <이 논문은 내 삶과도 별로 관계가 없고, 단지 나는 논문을 위한 논문을 썼을 뿐>이라고 말이다. 

탐구할 주제를 정했으면 책을 읽기 시작해야 한다. 그럼 무슨 책을 읽어야 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그 주제에 대해 가장 심오한 학설을 제시한 철학자의 책을 읽어야 한다. 이 철학자를 판별하는 근거는 베끼기를 통해 축적한 데이터베이스이다. 그 철학자가 쓴 책이 번역되어 있다면 일단 그걸 정독한다. 번역이 잘못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또 제대로 된 번역본이 드문 것도 사실이므로 원전으로 읽어야 한다. 원전을 읽기 위해서 해당 외국어를 익혀야 함은 당연하다. 철학자의 책을 읽어나갈 때는 머리를 비우고 그의 입장에 서서 읽어야 한다. 괜한 말 덧붙여 봐야 쓸데없는 일이고 감상일 뿐이다. 철학자의 책을 충분히 읽어서 그 책에 등장하는 개념과 논지들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있으면 관련된 책, 즉 해설서나 참고 문헌을 읽는다. 이 순서를 바꾸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자신이 관심 가진 주제에 대해 가장 심오한 학설을 제시한 학자가 칸트라면 칸트의 책부터 읽어야지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민음사)부터 읽기 시작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순서를 바꾸면, 칸트의 책을 읽을 때에도 이미 들뢰즈가 규정한 칸트, 즉 <들뢰즈 버전의 칸트>를 머리에 담고 들어가게 되고 결국에는 자신의 글에도 들뢰즈가 강조한 문장만 인용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도서관에서 어떤 철학자에 관한 논문을 여러 권 가져다 놓고 인용된 원문을 비교해 보라. 거의 다 똑같은 걸 인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자신의 눈으로 읽은 성과를 발견할 수 없다. 순서를 바꿔 공부했기 때문이다. 

외국의 학자가 쓴 참고 서적이라 해서 크게 주눅들 건 없다. 그들이라고 특별히 뛰어난 건 아니다. 어차피 철학사에 이름이 못 올라가기는 그들이나 나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내 논문에서도 본문에 이름을 올릴 만한 사람들은 아니다. 각주로 처리해야 할 사람들이다. 국내에서 나온 해설서나 관련 논문도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외국의 책들을 군데군데 떼어다가 짜깁기 해놓은, 이른바 <이중 저작>인 경우가 허다하고 내용상 학설 소개에 그치고 자기 생각을 드러내놓은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참고 서적을 읽은 다음에는 다시 철학자의 책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읽는다. 누가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이거 무슨 말이냐고 물으면 나름대로 논리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읽어야 한다. 이 정도가 되면 이제 자기 글을 써볼 차례다. 

오로지 원저작만을 인용하여 글을 써야 한다. 그렇게 써서 글이 안 되면 원저작을 다시 읽어야 한다. 원저작의 인용만으로 글을 쓴 다음에는 참고서에서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여 각주에 덧붙인다. 본문과 각주가 글에서 차지하는 지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각주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본문은 글의 뼈대요, 살이다. 각주에나 들어갈 내용을 본문에 쓰는 것은 페이지 늘리기이다. 앞서의 예를 다시 들어보자면 칸트의 저작을 중심으로 자신의 논지를 전개해 나가자면 본문에는 그의 원전에서 인용한 것만이 들어가야 한다. 들뢰즈의 {칸트의 비판철학}에 담긴 내용은 각주에서 처리하면 된다. 들뢰즈가 제시한 칸트 해석을 논문의 주제로 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논문이 아니라 소개글, 또는 에세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지 몇 년 되지도 않은 학자의 이야기를 주제로 논문을 쓰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원저작의 내용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원저작과 대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대결이 없다면 영원히 참고서에 의존해야 하고 원저작을 넘어설 수 없다. 물론 원저작의 내용만으로 글을 쓰기보다는 자기 주장만으로 글을 쓰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현단계에서 그걸 하는 건 도사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원저작과 대결함으로써 철학자의 사유의 힘을 익히고 깊이를 다져서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면 부딪히는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지만 그중 제법 심각한 것 중의 하나가 문장이 안 된다는 것이다. 주어 동사가 맞지 않는 문장으로 가득한 학술 논문, 우리말이 안 되는 번역본이 사방에 쌓여 있는 건 문장 쓰기 훈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런 쓰레기 더미를 쌓는 일을 거들겠다면 문장 훈련을 게을리해도 좋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평소에 글을 써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소개서 한 장도 안 써본 사람이 논문을 쓰기 시작하는 일이 너무도 자주 일어난다. 여기저기서 떼다 붙인 글로 리포트를 써내던 사람이 자기 논문을 쓰기 시작하니 할 말이 없어진다. 떼다 붙인 글들도 문장이 안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평소에 아무 주제나 붙잡고 글을 써봐야 한다. 그게 어려우면 일기라도 날마다 써야 한다. 말은 일사천린데 글은 엉망이라면 공부를 접는 게 낫다. 생각이 표면에서만 떠돌 뿐 되새겨지지 않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말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는 사람은 아예 책도 들여다보지 말아야 한다. 생각도 정리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책 한 권도 끝까지 읽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과 주석으로 이루어진 논문을 배척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은 무시해도 된다. 생각의 결을 따라서 물 흐르는 듯이 이어지는 글은 언제든 쓸 수 있지만 엄격한 틀 속에서 글을 쓰는 훈련은 다시 할 기회가 없다. 글은 최대한 간결하게 써야 한다. 열 개의 문장으로 하던 이야기를 절반으로 줄이고 그걸 단 한 문장으로까지 줄일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말한 주제 정하기, 원저작과 참고서 읽기, 글쓰기는 모두 혼자서 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의논해서, 스터디를 통해서 함께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른바 <스터디>라는 거 해봐야 대강 대강 읽기 마련이고, 끝나고 벌어지는 뒤풀이나 열심히 하게 될 것이니 시간 낭비다. 물론 이런 사교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기는 있다. 그런 사람과는 아예 상종을 말아야 한다. 내 눈으로 읽어서 내 손으로 쓰는 것이 핵심이다. 정 모르는 게 있으면 선배에게 묻지 말고 지도 교수에게 물어야 한다. 선배가 가까우니 선배에게 묻는 것이 쉽겠지만 그거 좋은 점 하나도 없다. 우선 선배는 불확실하게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삼 사년 선배라 해도 자신보다 크게 나을 것 없다. 또 선배에게 자주 묻다 보면 공부와는 관계없는 <인간 관계>가 생겨서 훗날 그 선배의 글을 냉정하게 비판하기도 어렵게 되고, 제대로 된 토론을 하기도 어렵다. 선배를 우습게 안다고 말하는 선배는 정말로 우습게 알아도 된다. 



마지막으로 할 일은 공부를 심화시키는 과정이다. 지금까지는 기존의 철학자의 사고를 검토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나의 언어로 소화시키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부터 하는 일은 나만의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참으로 복합적인 영역과 재료로써 이루어진다. 철학으로 간주되는 영역만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이다. 공부를 심화시키는 목표는 교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학자가 되는 데 있다. 공부는 벼슬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교수가 되는 방법은 따로 있다. 교수가 되려면 철학 이외의 분야를 공부해서는 안 되고 철학에서도 자신이 전공하는 세부적인 부분 이외의 것을 공부해서는 안 된다. 세부 전공 분야에서의 다른 교수들, 특히 외국의 교수들의 논문이나 책을 대강이라도 많이 읽고, 그들의 논의를 소개하는 글을 쓰는 것이 좋다. 굳이 비판까지 할 필요는 없다. 될 수 있으면 가장 최근의 책에 들어 있는 내용을 골라서 소개하고 잘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런 글을 써서 학회에 가서 부지런히 발표도 하고 마찬가지의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과 사교도 하고 자신의 글이 학회지에 실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교수가 되고 나서 그 바닥이 편협하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건, 스스로가 그런 것도 예측하지 못한 바보임을 자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학자가 되려면 우선 공부를 시작할 때 했던 일, 즉 베끼기를 계속해야 한다. 자신이 집중적으로 연구한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해서 철학의 전 영역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한다면, 다른 분야를 공부한 사람의 글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해도 못하는데 토론과 비판은 더더욱 할 수 없을 것이다. 기본적인 것을 계속해서 다지는 것은 심화된 공부에 있어서도 밑거름이다. 심화의 과정에서는 반드시 다른 분야의 책을 읽어야 한다. 우선 읽어야 할 분야는 역사이다. 통사는 물론이고 세부적인 항목을 다룬 역사책들도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역사책 읽기는 철학적 주제들에게 생동성을 가져다준다. 몰역사적인 철학적 사유는 위험한 것이다. 철학이 시대가 요구하는 바에 부응하려면 과거에는 어떻게 했는지 알아야 한다. 그걸 전범으로 삼아 오늘날 요구하는 바를 파악해야 한다. 과거와 오늘날의 끊임없는 대조를 통해서만 철학적 탐구가 빠져들 수 있는 추상성이라는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한다면 신문이나 잡지 등을 열심히 읽어야 함이 기본이다. 신문이나 잡지를 읽되 사회과학적인 인식을 가지고 읽어야 하므로 사회과학 관련 서적도 열심히 읽어야 한다. 역사와 사회과학에 대한 독서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야만 자신의 철학을 정립할 기본을 갖출 수 있고, 그것이 공허한 탁상공론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기초가 튼튼한 메타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철학 속에 <삶>이 들어간다. <생활 속의 철학>은 고매한 에세이 쓰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말처럼 철학 공부하는 이들도 시대의 아들이다. 그러니 시대를 넘어설 수 없고, 시대를 넘어서는 사유를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시대에 충실한 학문을 하는 것이 오히려 보편적인 사유로 가는 첩경이 아닐까. 철학사에서 접하는 철학들 중에서 오로지 철학만 공부해서 얻어진 것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모든 분야를 골고루 천착한 결과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학자가 되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훌륭한 학자가 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훌륭한 학자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는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성인데, 이게 구체적으로는 먹고 사는 일과 연결되어 있어서 자기를 먹여 살려주는 사람을 욕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목이 걸려 있는 일에 소신을 거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말로는 대의명분을 지껄여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열이면 아홉이 수그러드는 게 사람의 행태다. 그러니 아예 속 편하게 학문과는 무관한 직업을 가지는 것이 학문적 독립성을 지키는 데에는 가장 좋을 것이다. 게다가 직업을 가지면 구체적인 현실 속에 정신이 자리잡을 수 있고 지식인들이 보여주는 자학과 자만에 빠지지도 않는다. 글을 통한 현실 공부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이차적인 것일 뿐이다. 스피노자를 존경한다고 말로만 떠들지 말고 당장 안경사 자격증을 따라. 



지금까지 어설프게나마 적어본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기 학대>이다. 스스로를 괴롭히면서도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매저키스트가 된다면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공부를 해서 명예를 얻지 않아도 슬프지 않으며, 공부가 돈이 되지 않는다 해도 서럽지 않다. 어쩌면 이런 상태가 바로, 옛사람들이 말했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인지도 모르겠다. 



강유원, '내가 공부하는 방법', <현대사상> 9호, 민음사, 1999. 

잡담 잡담

강** 는 1967년생인데 6년전 그러니까 마흔 네살에 '동서양철학의 모든것'이라는 부제를 단 철학사 책을 스스로 썼고, 올해 개정판을 냈다.

또 다른 강**는 1962년생인데 역시 6년전 그러니까 마흔 아홉에 동서양 고전을 해설한 해설서 시리즈를 쓰기 시작하였고, 올해 철학 고전의 해설서와 함께 '철학으로서의 철학사'라는 관점의 표준적인 철학사를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무슨 책이 많이 팔릴지는 안봐도 뻔하다. 지혜를 가졌다고 말하는자와 지혜에 대한 추구 즉 변증술에 능숙해지기 위해 노력하는 자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항상 그러했으니까.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더 나은 것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인가. 훌륭한 학생이 되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다.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서 시키는대로 하는 것 뿐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그런데 본인이 훌륭한 학생이 아닌데 훌륭한 선생이 누구인지 어찌 알겠는가. 그저 우연이었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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