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시타 나츠(지음), 이소담(옮김), <양과강철의숲>, 예담, 2016(3쇄)

"재능이란 무지막지하게 좋아하는 감정이 아닐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대상에서 떨어지지 않은 집념이나 투지나, 그 비슷한 무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해." 야나기 씨가 차분하게 말했다.



움베르토 에코(기획), 김효정 등(옮김), <중세 I>, 시공사, 2016(4쇄)

한페이지 가득히 나오는 학자들이나 그들의 저서, 그리고 그와 연관된 사건들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경험. 내용을 요약할 수 없는 이러한 책들을 자리에 앉아 기계적으로 일주일에 200페이지씩 읽어나가는 경험, 다 읽고 났는데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그저 '읽었다는 경험'만 남는 경험. 

중세에 대한 내 지식수준이 형편없다는 점을 절실히 깨닫게 해주었으며, 지난번 <유대교와 헬레니즘>에서도 그랬지만 진지한 학문적 저술이 얼마나 고리타분하고 소소한 것들을 끈질기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려준 책. 

강유원(지음), <철학고전강의> 읽기(2) 수업



"아리스토텔레스의 규정을 따른다면 우리는 헤시오도스의 텍스트를 읽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논증을 통해 주장을 내세우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과 우주의 전 국면에는 논증을 통해서 해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으며, 그것까지도 포괄해야만 철학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철학의 한 영역인 형이상학을 공부하면서 <신들의 계보>를 읽는다는 것은 철학에 대한 관점도 달리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신들의 계보>를 읽으면서 그것의 내용도 따져봐야 하지만, 종래의 철학이라는 것에 포함시킬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신들의 계보>를 읽는 이유는 이러한 우주론 안에 철학적 사색의 맹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신화(뮈토스)에서 이성(로고스)으로의 전환, 이것이 철학의 시작이다'라는 말은 일단 배제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강 : 우주론, 철학적 사유의 시작


"신은 진리를 가진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진리를 가진 자인 신이 인간과 어떻게 만나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단 표면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이 어떻게 진리를 알게 되는가에 대해 이야기한 것입니다. 신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은, 인간이 어떻게 진리를 알게 되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우주 생성론이면서 동시에 우주 생성론의 기원을 밝혀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

<신들의 계보>는 단순히 신들의 족보 묶음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설명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신들의 계보>는 신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해설에 나와 있는 것처럼 "철학의 선구자"가 됩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이성주의 철학관에 의하면 신화(뮈토스)에서 이성(로고스)으로 나아가는 것이 철학이지만, 우리는 신화와 철학의 경계선을 그렇게 뚜렷하게 알 수 없으며, 그에 따라 이러한 신화에서도 철학의 단초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강 : 희랍사유에서 우주의 구조와 생성 과정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전통적 해석에 따르면, 그가 말하는 일자는 불변의 초월적 실재이며, 그 일자가 속해 있는 형상계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상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거대한 단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형상계와 현상계를 상정하는 '두 세계 이론'입니다. 
(...)
파르메니데스의 이른바 '일자 형이상학'을 '현상 세계와 법칙'이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면 파르메니데스는 과학 이론을 제시한 선구자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
또다른 해석은 나중에 다시 상세하게 살펴볼 것인데, 파르메니데스의 형이상학이 어떤 실재에 대해 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문의 출발점을 마련하기 위한 기초적인 논의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즉 파르메니데스의 형이상학이 학의 시원을 마련해준다는 것이지요."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강 : 존재의 근본 개념(파르메니데스)

"파르메니데스의 이 주장을 플라톤이 받아들였다고 해봅시다. 플라톤의 이데아(형상)는 불변의 초월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스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형상은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초월적 일자를 염두에 두고 구상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는 플라톤의 형상론의 이론적인 선행 모형인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에서는 누스로만 파악될 수 있는 초월적인 일자의 세계와 감각기관에 알려지는 거짓 세계, 두 개의 세계가 분명히 대립됩니다. 이것은 이원론입니다. 이원론이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시작되는 셈입니다. 
(...)
그렇다면 플라톤과 파르메니데스가 분명히 알 수 있다고 말한 초월적 실재는 과연 초월적 실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초월적 실재라는 것은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신이 알려주는 것이나 갑자기 알게 되는 것이나 인간의 감각기관을 거치는 것은 초월적 실재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감각기관이 아니라 누스(정신)을 거친다고 해도, 정신은 감각기관과는 다른 그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지계에 대해서는 인간이 앎을 가질 수 없으니,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데이터에 기반한 앎, 즉 현상계에 대한 앎으로 만족하자는 것이 칸트의 주장입니다. 칸트는 예지계에 대해 인간이 무엇을 말할 때 그것은 "초월적 이념에 대한 가상"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저 인간이 상상하는 것을 이념이라 해두고서 그것을 알 수 있다고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4강 : 일자와 두 세계 이론(파르메니데스에 관한 '전통적' 해석)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는 밝은 것과 어두운 것, 서로 대립되는 원소들을 섞어 배열하고 이것들로부터 현상을 완성합니다. 그는 현상의 배열을 완성했습니다. 현상의 배열을 완성하려면 현상을 꿰고 있는 법칙을 알아야만 합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자연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햇으며, 인간의 생성에 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연학에 몸담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파르메니데스는 초월적 형이상학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자연 현상을 누스로써 파악하여 그것이 움직이는 법칙을 탐구할 것을 촉구한 사람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5강 : 대상 세계에 관한 탐구(파르메니데스에 관한 현상-법칙 해석)

"파르메니데스는 그릇된 길에 대해서는 애초에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릇된 길, 있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있음의 길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릇된 길, 잘못된 길도 생각해봐야 됩니다. 그래야 완전한 생각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단에 빠지게 됩니다. 존재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은 독단인 것입니다. 있음의 길과 없음의 길, 완전한 양극단을 다 생각해보아야 독단에 빠지지 않습니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 모순입니다. 하나가 성립하면 다른 하나는 절대로 성립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길로 갈 것인지를 반성하는 최초의 사유는 모순되는 것들에 대한 생각인 것입니다. 이것들은 현실에서는 동시에 있을 수 없지만 인간의 사유 속에서는 동시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모순된 상황을 견디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있음도 생각하고 동시에 없음도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장 근원에 놓여 있는 사유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6강 : 학문 탐구의 방법 (파르메니데스에 관한 '학의 시원'해석)

"우리는 파르메니데스 단편들을 읽으면서 형이상학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논제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학적 탐구의 대상, 그 대상의 성격 및 그것과 관련한 우리의 앎의 성격, 우리의 앎이 이루어지는 방법 등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 또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지만 그가 좀 더 집중하는 문제는 운동 또는 변화에 관한 것입니다. 그의 단편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순서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그것들은 인간의 무지의 상태에 대해 비판하고, 선행하는 이론들에 대해 검토합니다. 그에 이어서 지혜로운 자가 파악하는 로고스와 그 로고스에 따라 파악된 우주에 관한 논의가 전개됩니다. 이 과정에서 변화하는 세계에서 불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집중적으로 논의하게 됩니다."
(...)
세상의 모든 현상의 배후에는 그것을 움직이는 로고스가 있습니다. 그 로고스를 아는 사람은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을 아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로고스가 아닌데도 로고스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말에도 흥분하기 십상"입니다. 어떤 것은 로고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진리로서의 로고스가 아닙니다.  그냥 사람들이 지껄이는 말을 로고스라 부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런 사람들은 심하게 짖어대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동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개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것들을 향해서 짖는다". 참다운 로고스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혼자 있을 때에는 짖어대기만 할 뿐이지만 여럿이 모이면 다른 행동을 합니다. 그들은 "어떤 지성이나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대중의 시인들을 믿고 군중을 선생으로"삼습니다. "다수의 사람들은 나쁘고, 소수의 사람들이 좋다"는 것은 알지도 못하면서"(DK22B104) 그렇게 합니다. 이런 언급을 두고 헤라클레이토스가 엘리트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사람들을 무시했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무지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7강 :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 로고스(헤라클레이토스)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인 전체가 있고, 그것의 계기들은 서로 대립되면서, 끊임없이 운동하면서 전체의 자기정체성을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하게 '만물은 변한다'라는 주장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강물의 비유'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강물의 운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강이 강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가 일종의 일원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가 전부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변화를 통해서 하나가 유지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
그런 까닭에 우리는 그를 극단적인 유전론자라고 말할 수 없거니와, 이는 바로 헤라클레이토스에 관한 플라톤의 견해를 다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거칠게 규정하자면 소피스트들은 진리가 불변의 것이 아닌 상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바로 헤라클레이토스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피스트 상대론의 이론적인 근거는 헤라클레이토스이고, 소피스트를 논박하려면 헤라클레이토스를 논박해야 하므로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을 어떤 식으로든 규정해야만 하는데, 그것을 극단적인 만물유전론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8강 : 변화하는 여러 현상들과 궁극적인 '하나'(헤라클레이토스)

"다시 말해서 불변의 좋음에 관한 철학적 통찰과, 시행착오를 거쳐서 잠정적으로 내놓은 역사적 지혜는 양립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둘을 놓고 우리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학에서 인간학으로의 전환'이라는 주제에는 이처럼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습니다. 이것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따져보는 것이 우리가 플라톤을 읽는 까닭입니다. 
(...)
<파이돈>에서는 실천적 차원에서 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밝히는 논변들이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형상론을 중심으로 이것들을 살펴보는 것이 <파이돈> 읽기의 첫째 과제입니다. 
 둘째 과제는 변증법이라는 방법론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논박술과 산파술로 되어 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9강 : 잘 산다는 것

"지금까지 <파이돈>에서 읽은 바를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등과 관련지어 정리해봅시다. 소크라테스에 의해 자연학에서 인간학으로의 전환이 시도되었고, 파르메니데스나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의 문제를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다룬다 해도 인간의 앎의 확실성에 대해 다루었을 뿐 인간의 삶에서 생겨나는 최선의 상태, 좋음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가 자연학에서 인간학으로의 전환을 시도하면서 심각한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바로 인간의 파토스 때문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구체적으로 겪는 일들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열정과 고통입니다. 인간의 행위와 그 행위로써 이루어지는 삶은 법칙으로 추려낼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종은 규정할 수 없는 존재, 한정을 지을 수 없는 존재, 무한정자無限定者(apeiron)가 되는 것입니다. 자연학에서 인간학으로의 전환은 획기적인 시도인데, 이 시도가 시작부터 난관에 처하였습니다. 인간에 대한 규정을 만들어내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0강 : 형상실재론, 형상시원론

"소크라테스가 찾은 것은 '무엇'이고, 이것은 추론의 시작점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찾은 것은 불변의 실재가 아니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로고스들입니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귀납적 추론과 보편적 정의"라고 말합니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둘째 항해를 달리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학문의 시작과 관련된 것입니다. 일단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논의의 출발점을 찾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차선의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의미 규정이 된 말들(logoi)을 매개로 이성(logos)에 의해 존재하는 것들의 진리를 고찰 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증법(dialektiē)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1강 : 합의된 규약에 의지하는 '차선의 방법'

"<파이돈>의 형상 논변은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입니다. 인간이 확실한 앎을 가지기 위해서는 나면서부터 확실한 것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혼이 불멸해야 합니다. 인간은 불멸하는 이 영혼을 잘 단련해야 형상에 대한 앎을 가질 수 있습니다. <파이돈>에서 형상에 관한 논의는 인간의 영혼에 관한 논의에 부수적인 것입니다. 
(...)
플라톤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완성 상태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플라톤은 인간은 정치적 공동체(koinōia)에 살 때에만 완성 상태에 가까워진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완성태에 이르려면 공동체에서 남들과 만나야만 합니다. 공동체를 다루는 <국가>나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정치가를 다루는 <정치가>(politikos)는 정치학이지만, 여기까지 진전될 때에라야 인간이 완성된 상태에 가까워질 것이므로 넓은 의미의 인간학이기도 합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2강 : 같음과 같음 자체에 관한 논변

"<파이돈>에서 우리는 인간의 영혼불멸과 관련한 논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시도한 자연학에서 인간학으로의 전환을 본격적으로 진전시킵니다. 이러한 진전은 좋음의 이데아에 관한 논의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 세계에 대한 확실한 앎이 아니라 참으로 좋은 것에 관한 앎입니다. 이 앎의 대상은 배움의 최고 대상으로서의 '좋음의 이데아'(hē tou agathou idea)입니다. 이에 관한 논의가 <국가>에서 전개됩니다. 이것은 플라톤 형이상학의 핵심 논변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태양의 비유를 다시 정리해봅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잘 보려면, 즉 보는 힘을 가지려면 빛이 필요합니다. 빛은 어디서 옵니까. 태양에서 옵니다. 다시 말해서 태양은 보는 힘을 제공합니다. 태양은 가시계에 힘을 주는 원인이 됩니다. 힘(dynamis)인 태양 빛이 강할 때는 또렷하게 보입니다. 이것은 낮의 빛에서 보는 것이고, 빛이 약할 때는 밤처럼 어스름하게 보입니다. 대상은 같은데, 즉 같은 대상을 태양 빛으로 보는데, 그 강도가 다릅니다. 가시계가 작동하는 방식은 이러합니다.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은, 보는 장소가 다릅니다. 좋음이 주는 힘에 의해서 보는 장소가 다른 것입니다. 태양의 비유에서는 힘만이 서로 상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3강 : 참으로 좋은 것에 관한 앎(태양의 비유)

"그리고 나서 이제 "누군가가 그를 이곳으로부터 험하고 가파른 오르막 길을 통해 억지로 끌고"가게 되고 여기서 갑자기 동굴을 올라갑니다. 동굴 바깥으로 가는 것입니다. "햇빛 속으로 끌어내올 때까지 놓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또한 자신이 끌리어온데 대해 짜증을 내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여기서 고통스러워 하며 언짢아 하는 원인은 무엇일까요? 진리를 아는 것은 고난을 겪어가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는 것은 자신에게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자기가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익숙한 것이라 하여 인식된 것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
태양의 비유는 인간에게 참된 진리를 알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밝혔습니다. 선분의 비유는 그 참된 진리가 어떠한 단계를 거쳐가는 것인지를 논증하였습니다. 동굴의 비유는 누가, 어떤 방식으로 진리를 알아내는지를 이야기했고, 그렇게 알아낸 진리를 무지한 이들에게 가르쳐주는 실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동굴의 비유 첫머리는 교육이라는 실천을 암시하면서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4강 : 참으로 좋은 것에 관한 앎과 그것의 실천(동굴의 비유)

"플라톤은 개인의 영혼이 완성된다고 하여 좋음의 이데아에 이를수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좋음의 이데아를 탐구하기 위하여 논의의 범위를 정치적 공동체로 확장시켰습니다. 그는 좋음의 이데아의 파악이라는 이론적 작업이 정치적 공동체에서의 실천적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플라톤이 이 논의를 위해 제시하는 대표적인 논변은 태양의 비유, 선분의 비유, 동굴의 비유 등인데, 이들 비유에 제시된 설명을 통하여 우리는 좋음의 이데아가 모든 것의 궁극적 원리이며, 그것은 변증술적 논변의 힘에 의해서 파악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변증술적 논변의 힘을 가진 자는 철학적 통치자입니다. 철학적 통치자는 단순한 이론적 인식만을 가진 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다양한 직무를 통해서 실천적 삶을 겪은 자이기도 합니다. 철학적 통치자뿐만 아니라 인간은 '힘'(dynamis)을 가지고 있어서 상재相在, 즉 본질적 존재를 파악할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 즉 정재定在를 변경시켜야만 합니다. 상재의 파악은 이론이고, 정재의 변경은 실천인데, 이러한 이론과 실천, '실천을 통한 이론', '이론을 위한 실천'은 인간 개인이 아닌 정치적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좋음의 이데아를 중심으로한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이처럼 이론과 실천이 중첩되는 차원에 놓여 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5강 : 아는 것과 하는 것, 이론과 실천의 통일

"이론학에 속하는 것 중에서 신학에 관하여 설명을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신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초월적인 인격 신에 대한 탐구'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신(theos)은 제1의 원인입니다. 달리 말하면 '첫째가는 ,가장 지배적인 원인'이라고도 합니다. 신은 첫째가는 가장 지배적인 원인이기 때문에 초월적인 것이 아닙니다. 신은 존재의 세계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학이라 해도 모든 존재들(ta onta)을 다루는 존재론에 통합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격을 가지는 신을 논의하는 저작이 <형이상학>입니다. 형이상학은 일반적으로 '초월적인 것'을 다룬다고 알려져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책 제목이 그러하다 해도 내용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유념해두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제목 자체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붙인 것이 아닙니다. 후대의 학자가 편집할 때 <자연학> 다음에 이 책을 배치하면서 그렇게 명명한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6강 : <형이상학>의 구성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학문의 출발점은 '놀라움'(thaumazein)입니다. 놀라움에서 시작된 학문의 영역에는 이론학, 실천학, 제작학,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앎이라고 하는 것은 감각적인 앎부터 시작해서 기억, 경험, 그다음에 기술이 있고, 논증적 지식(입증 가능한 지식)과 제일원리를 파악하는 직관적 지식이 있으며, 그 둘을 합한 지혜에 이릅니다. 거듭 말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감각지부터 시작하여 지혜에 이르는 과정은 누적적인 앎의 과정입니다. 대체로 보아서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가 감각지의 단계이고, 그다음이 경험과 기술의 단계이며, 마지막이 논증적 지식, 직관적 지식, 지혜의 단계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7강 : 앎의 종류와 단계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형상론에서 가장 심각하게 제기하는 질문이 이것입니다. 그 사물을 그 사물이게 해주는 것은 형상인데, 그 형상이 어떻게 그 사물 밖에 따로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형상은 그 사물 안에 있어야 합니다.이것이 우리의 상식에 부합한다 할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이 실체적인 것이 특수자들 안에만 들어 있다면, 특수자들이 생성 소멸함에 따라 그것도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실체는 특수한 것들에 내재해 있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특수자 안에 내재해 있음과 동시에 그 생성 소멸의 변화를 겪고 있는 특수자와 분리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형상이 특수자에 내재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분리되어 있다고 하면, 특수자와 형상의 관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형상은 특수자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특수자 밖에 있을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학이 성립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형상의 내재와 분리에 관한 아리스토텔스의 물음', 더 나아가 '학의 성립 가능성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음'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8강 : 형상의 분리와 내재 

"첫째로 있는 것을 다루는 학문은 첫째 학문(첫째 철학, prote philosophia)이고 그것은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보편적 존재론 위에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해서 보편적 존재론이 신학의 하위 학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보편적 존재론이 없다면, 신학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학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보편적 존재론과 신학은 상호포섭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존재에 관한 이 네 가지 언명 중에서 첫번째 '있는 것'은 우연적인 것에 관한 것이니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 번째 '있는 것'이 실체에 관한 논의이고, 세 번째는 언어적인 참/거짓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이고, 네 번째는 존재를 운동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것과 네 번째 것이 각각 실체론과 운동론이고 이것들이 존재론에서 핵심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9강 : 학의 성립에 관한 물음, 보편적 존재론과 신학의 관계

"자기 아닌 것을 아는 것은 사유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사유는 무엇일까요. 갑자기 '이것' 안에서, 정해진 존재 또는 규정적 존재 안에서 의문이 생겨나 '이것'이 속해 있는 유類, 즉 '무엇'으로 한 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에서 '무엇'으로 올라가는 것, 즉 상승입니다...동굴 벽면만 보고 있던 '이것'(tode ti)의 상태에서 동굴 밖의 '무엇'(ti esti)으로 나아가는 것은 자기 바깥으로 나가는 것, 자기외화自己外化입니다. 
(...)
소박한 자기 동일성에 머물러 있던 자신이 자기와 다른 '무엇'으로 올라와서, 자기와 다른 비동일성을 거쳐서 다시 자기동일성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돌아온 동일성은 비동일성을 거친 동일성입니다. 이는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입니다. 
(...)
위로 올라왔으니까 '무엇'의 입장에서 '이것'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무엇'의 대상입니다. 사유의 대상인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 안에 머물러 있을 때는 그저 단순 소박한 정재였는데, 사유를 통해서 '무엇'이라고 하는 규정을 덧붙이면 '무엇'의 사유 대상이 됩니다. '이것'은 무엇에 의해 '사유된 것'입니다. 사유된 것은 독일어로 게당케Gedanke입니다. 이것을 한국어로는 사상思想이라 번역합니다.
(...)
'이것'은 규정적 존재입니다. 자기 밖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자기 안에 머물러 있으니까 즉자 존재(Ansich -Sein)입니다. '무엇'은 규정적 존재가 자기 바깥으로 나온 것이므로 대자 존재(Fürsich-Sein)입니다. '무엇'은 '이것'이 무엇인지를 사유하는 것입니다. 즉 '무엇'은 '이것'에 대한 반성적 사유입니다. 그런데 '무엇'과'이것'은 같은 것들입니다. 개별자의 차원에서 보면 '이것'이고, 에이도스의 차원에서 볼 때는 '무엇'입니다. 제일 실체와 제이 실체가 사실은 똑같은 것인데 <범주론>과 <형이상학>에서 그 위치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먼저인 것과 본성상 먼저인 것의 차이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먼저인 것은 '이것'이고, 본성상 먼저인 것은 '무엇'입니다. 
(...)
'무엇'이라고 하는 본질이 '이것'을 사유했을 때, 그 사유는 '이것'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모습을 밝히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어떤 것인지를 밝히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이 둘은 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무엇'이 사유이고 '이것'이 정재라는 의미의 존재라고 한다면 '사유와 존재는 동일한 것'입니다. 여기서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이라는 테제가 성립할 것입니다. 
(...)
'이것'은 자신이 어떠한지, 자신이 참으로 어떠한 존재인지, 자신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무엇'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무엇'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누가 떠밀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밀고 가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전진적 운동입니다. 자기전진하는 이 운동의 본질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에 있습니다. '무엇'은 사유이고, 사유는 다르게 말하면 정신입니다. 따라서 이 운동은 '정신의 자기전진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이 스스로를 밀고 나아가는 운동인 것입니다. 정신이 스스로를 밀고 나아가서 세계 전체를 사유하면 세계를 자신의 앎으로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 정신은 신적 정신에 이른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0강 : 실체론, '이것'(tode ti)과 '무엇'(ti esti)

"사람은 누구나 공부를 할 수 있는 소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호기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공부를 하고 어떤 이는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가지고 설명해보면, 공부를 하지 않는 이는 공부의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르고자 하는 지점, 목적이 없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부에 관한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해야 할 사람을 움직이는 힘, 즉 목적입니다. '공부는 왜 하는가'부터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
측정 가능한, 작용하는 힘만 그때그때 정확하게 측정해서 그것만 운동이라고 하자는 사람들도 있겠는데 그들은 바로 근대의 물리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운동 개념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음이 무의미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궁극원인을 묻는 것이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
지성은 대상을 "접촉"하고 "포착"함으로써 대상을 수용합니다. 이를 통해 지성은 "사유대상을 소유"합니다.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로써 대상은 지성의 소유가 되었고, 대상은 폐기되었습니다. 이것은 대상이 사유로 지양(Aufheben)된 것입니다. 대상이 대상이기를 그치고, 즉 대상이 대상성을 폐기하고 정신화(Begeisterung)된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가 가진 대상성을 폐기하고 이렇게 자신의 사유 속으로 가지고 와서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새계 전체를 정신화하여 그것을 자신의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입니다. 인간이 이런 존재가 되면 신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신화神化입니다. 지성은 이러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적인 것'이며 '최후의 사유'이며, '이론적 활동'입니다. 헤겔은 <철학백과> 마지막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테오리아theoria를 인용하면서 '사변'(Spekulation)이라고 번역합니다. 헤겔은 이것을 사변적 사유로 이해한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1강 : 운동론, 가능태와 현실태

"'내가 생각한다는 것'이야말로 진리의 본질적 계기임을 알고 있는 철학은 자립적 철학입니다. 이 철학은 신학과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린 것이고, 그 자립적 철학에 착수한 사람이 데카르트입니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은 자립적 자기에서 시작합니다. 헤겔이 보기에 데카르트는 그것을 끝까지 밀고가서, 그것으로써 인간 이성의 철학을 구축했습니다. 헤겔이 보기에는 이것이 근대 철학입니다. 철학의 근대성은 바로 이 자립적 자기의식에서 성립합니다. 이는 물론 데카르트에 대한 헤겔의 평가이므로 과연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2강 : 자립적 자기의식, 데카르트 철학의 근대성

"제 1원리인 사유하는 존재, '내가 아는 것', 나의 '자기의식'으로 아는 것이 진리 인식의 원천 또는 근원입니다. 이것은 헤겔이 말한 "이성으로부터 나온 자기의식의 자립적 철학"입니다. 내가 알아야 신도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있다 해도, 그 신이 진리의 원천이라 해도 그 진리를 알 수 있는, 진리 인식의 원천인 '자기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 자기의식이 데카르트 철학의 출발점입니다. 데카르트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이를 분명하게 밝혀 말합니다. "이로부터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한 신이 존재하며"가 그것입니다. 이 신은 "모든 진리의 근원"입니다. 진리의 근원은 신이고, 진리는 신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신으로부터 아무리 많은 진리가 나온다 해도 진리 인식의 원천인 사유적 존재가 없으면 그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이렇듯 데카르트 철학에서는 진리 인식의 원천으로서의 '사유적 존재'와 진리의 원천으로서의 '신'이 구별됩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3강 : 진리의 원천과 진리 인식의 원천

강유원(지음), <철학고전강의>, 라티오, 2016

'첫시간' 요약

 철학은 '세상의 모든 것'(ta onta, Gegenstand überhaupt)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따라서 철학은 존재론(ontology)과 근원적으로 같은 말이라 할 수 있다. 존재론을 좀더 세부적으로 구분하여 인간의 감각적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 즉 '초월적인 것'을 다루는  '형이상학'과 초월적인 것을 제외하고 감각적인 것을 따져 묻는 '좁은 의미의 존재론'으로도 나눌 수 있다. 형이상학은 아주 오래된 학문 분야이므로 '전통적 형이상학'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이는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세계 전체에 대한 탐구인 '우주론'(kosmologia), 인간에 대한 탐구를 지칭하는 '영혼론'(psychologia) 그리고 이 둘을 꿰뚫는 원리를 다루는 '신론(theologia)으로 구성된다. <철학고전강의>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철학의 전 영역이 아니라 전통적 형이상학과 존재론이며, 우리는 이 두가지 학學을 다룸으로써 철학의 전 영역으로 나아가는 기본적인 원리를 터득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다음의 사상가들과 그들의 저술이 다루어진다. 

 헤시오도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은 고대의 사상가들은 <신들의 계보>나 일부 남겨진 단편들에서 서구 존재론의 씨앗을 보여주거나 세계 존재의 근본 원리와 세계가 움직이는 법칙을 탐구하였다. 그들은 세상을 움직이는 필연적 법칙을 문제삼았다는 점에서 형이상학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플라톤은 <파이돈>과 <국가>를 통해 세상 만물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인간을 문제 삼았다. 그는 인간이나 인간의 공동체를 '좋음'이나 '올바름'이라는 가치 위에 세우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초월적 형상'이라는 목적을 제시하였다. 이는 이후 플라톤주의자들의 근본 가정인 '두 세계 이론'의 확보부동한 토대가 되었으니, 그들은 이원론적 구조를 진리로 간주한 후 인간이 질적으로 변화되어 신이 되는 것 또는 신과 합일을 추구하였다. 우리는 그의 텍스트를 읽어나가면서 과연 플라톤이 이러한 초월적인 것을 확고하게 정초하였는지 다시 음미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스스로도 인간이 초월적인 것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을 의심하였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플라톤과 달리 경험 세계에 대한 앎을 완전히 폐기하지는 않는다. 그는 자연학과 존재론 그리고 신론을 제시하며 감각에서 시작하여 부동의 원동자에 이르는 완결된 체계를 구축하였으니, 그를 서구 형이상학의 실질적인 정초자라 칭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철학의 원리>나 <성찰> 등을 통하여 '인간의 자기 의식'과 '초월적 신'을 진리를 형성하는 주요한 요소로 제시하였다. 그는 초월적 영역에 진리가 있음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진리를 만들어내는 데 '나의 생각'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였고, 이것의 진리성을 보증하는 존재가 신이라 하였다. 이는 헤겔에서 완성되는 근대 형이상학의 시도, 즉 신적 입장으로 올라선 인간의 자기의식의 출발점이다. 
 헤겔은 <철학백과>나 <정신현상학>을 통해 유한한 인간이 역사 속에서 모든 것을 음미하면서 신적 입장에 올라설 수 있음을 체계적으로 밝히려 하였다. 그는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초월적인 것과의 갑작스러운 합일로써 지혜를 성취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을 매개로 하여 절대적, 즉 무한자의 입장에 올라선다고 하는 역사 형이상학 또는 역사 존재론을 제시하였다. 우리는 비록 그의 사변적 체계가 장대하기는 하지만 인간이 그것을 성취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을 뿐더러 인간이 그것을 원하고 있는지도 불분명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칸트는 <형이상학 서설>과 <판단력 비판>에서 종래의 형이상학에서 제시되었던 문제들을 초월적 이념으로 규정하여 탐구의 영역에서 폐기함으로써 전통적 형이상학의 문제들을 완전히 해소하였다. 즉 이것이 철학의 탐구 대상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 도덕과 같은 경험 세계의 데이터에서 기반하지 않은 것들의 정당화를 위해 '장래의 형이상학'을 구상하였다. 그가 시도한 '체계'가 구성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과학적 앎과 무한한 목적에 대한 통일이 잘 성취되었는지는 미지수이다. 

 우리는 이러한 텍스트들을 '무지無知의 지知'라는 태도를 기반으로 읽어나가야 한다. 이는 자신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을 전면적으로 의심하여 자기가 발 딛고 서 있는 밑바닥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자신이 무지의 상태임을 자각하여 자신의 전 존재를 위험에 빠뜨리는 태도이다. 존재 자체의 위험에 처하는 것, '나 이것 모릅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대상 세계를 인식하고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만들어내는 존재 자체를 총체적으로 뒤흔드는 것이며, 이 상태로 들어가야만 비로소 앎이 시작된다고 할 것이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네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라'라는 언명에서 잘 드러난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삶과 그것에 결부된 앎 전체를 철저하게 다시 설정하고 그에 따라 전면적으로 다시 형성해나갈 것을 요구하는, 일종의 존재론적 결단을 드러내는 태도이자 우리가 공부할 때 견지해야만 하는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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