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이야기(밀양), 이청준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지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가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가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본문 중)


1. 그의 죄는 과연 그 어미에게 먼저 용서 받아야 할까? 오히려 죽은자에게 먼저 용서받아야 하지 않을까?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개독교 씹는 이야기에 좀 통쾌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책을 읽은 후도 마찬가지였다. 저자의 의도는 아마도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자가 용서할 권리마저 빼았긴다면 그는 인간도 아닌 '벌레' 취급을 받는 것이다라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주제보다 조금 다른 이야기에 더 눈이 갔다.

2. 나는 그 어미의 슬픔을 좀처럼 공감하기 어려웠다.  원작 소설에서는 그 어미가 끝내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나와있다. 영화에서는 좀 완화(?)되어 잔잔한 햇빛을 보면서 마무리된다. 어찌되었건 자기 목숨만큼 누굴 사랑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억울하게 죽어서 원통하겠다. 하지만 자신도, 그 살인자도, 아이를 못찾은 경찰도 모두 죽어야할 목숨인데 왜 그렇게 스스로의 목숨을 끓을 만큼 애절한 일인지 동감이 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내일 당장 죽을 수 있는 유한한 자들이 아닌가.

3. 슬픈 것이 이해가 된다해도 사실 그 뿐이다. 죽은 아이의 명복을 빌어주는 것, 그 범인을 찾아 벌을 받게 하는 것 그리고 죽은 이의 부재를 슬퍼하는 것 이외에 우리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죽은 이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원래 인간의 숙명이다. 슬퍼하는 것 외에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범인을 용서한들, 용서하지 않은들 세상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4. 빼았겼다는 표현이 좋겠다. 그 어미는 자신의 소중한 것을 '빼았겼다'. 그 아이는 원래 그 어미의 소유였는데 누군가 갑자기 자신에게서 가져가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그리 슬프다. 같이 살아 숨쉬는, 독립된 존재라기 보다는 그 어미의 소유물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렇기에 그리 슬프고 그렇기에 그리 억울한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나는 내 부모님의 소유물이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내 아이는 나의 소유물인가? 아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긴 한건가?

5. 집을 잃고 슬픈자, 돈을 잃고 슬픈자와 아이를 잃고 슬픈자의 본질적인 차이는 뭘까? 집과 돈은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없어서인가? 사람이 사람을 잃고 난 후에 그리 슬플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전에는 나는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by 여형사 | 2009/06/29 12:03 |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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