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무로 신이치(지음), 정재정(옮김), <러일전쟁의 세기>,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0

"이 책의 과제는 러일전쟁의 군사사적 서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러일전쟁을 하나의 단서로 삼아 근대 일본이 세계사의 흐름과 어떻게 이어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를 통해 어떻게 서구 또는 아시아 사이에서 균열을 낳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1장, 근대 국제사회로의 참가, 21쪽)

"많은 경우 속국에서 헌납한 물품의 가치를 상회하는 물품이 '회사'로 주어졌기 때문에 조공국은 이것에 의해 선진 물산을 얻을 수 있고, 중국의 비호와 권위를 빌려 대내적으로도 지배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 이후, 일본은 이 책봉, 조공체제로부터 이탈하고, 중국을 교역만 하는 '통상의 나라'로, 또한 조선은 사자를 교환하여 친분을 통하는 '통신의 나라'로 했다."(36쪽)

"이리하여 서구의 국제법을 준수하는 것을 내걸고 출발한 메이지 국가는 메이지 연간의 방황 끝에 그로부터 이탈했을 국제체계인 책봉, 조공체제로 회귀했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52쪽)

"이와 같이 시베리아 철도의 건설은 영국이 해군력으로 유지해온 유럽 열강 간의 주도권을 흔들 뿐 아니라 인도의 영국 통치에 불안을 주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영러항쟁을 격화시켜 아시아의 기존 권익과 세력지도를 고쳐 쓴다는 의미에서도 국제 정치정세에 큰 충격을 준 것이다."(2장,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변화, 65쪽)

"그중에서 주권국가는 다른 나라의 침해를 허용하지 않는 국경으로서의 '주권선'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이웃 나라와 접촉하는 세력, 우리 주권선의 안위와 긴밀하게 관련을 맺는 구역'으로서의 '이익선'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이익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군사비가 필요하게 된다는 논리이다.. 같은 해 3월에 나온 <외교정략론>에서 "우리 나라 이익선의 초점은 실로 조선에 있다"고 명언한 것이다."(71쪽)

"그러나 반대로 보면 1902년 1월까지는 영일과 러일의 협조를 찾는 시도가 병행되어 일어나고 있고, 러일전쟁으로 들어갈 필연성은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3장, 러일개전으로, 125쪽)

"그러나 이와 같은 열악한 전력으로 싸워야 하는 전쟁임이 분명했기 때문에 러일전쟁은 군사전쟁으로서만이 아니라 선전전쟁이자 또한 미디어전쟁이기도 한 복합전쟁으로서, 또한 전장과 기한을 한정한 국지단기전쟁으로 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142쪽)

"왜냐하면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는 일본이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던 서구와 아시아와의 대립이라는 구도를 더욱 부상시키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에 일본은 황화론을 부정하기 위해서라도 외교적으로는 아시이와는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서구와의 협력노선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구와의 동맹이나 협정 등에 따라 아시아 여러 민족의 독립운동을 억압하고, '아시아의 공적'으로 간주되어 갔다."(4장, 20세기 최초의 세계전쟁, 190쪽)

"일본이 러시아에게 승리한 그날로부터 전 아시아의 민족은 유럽을 타도하고자 독립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집트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페르시아나 터키에서도 독립운동이 일어났으며, 아프가니스탄이나 아랍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인도 사람도 이 시기부터 독립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이유로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한 결과로서 아시아 민족의 독립이라는 커다란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쑨원, <대아시아주의, 1924)(5장, 세계와의 관계, 일본을 향한 시선, 203쪽)

"나아가 러일전쟁에서 얻은 전훈으로서 아무리 군비의 확장을 도모한다고 해도 일본의 국력으로는 소모전에 견디지 못하는 이상 이것을 정신력으로 보완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방침이 채택된다. 1908년 <군대내무서개정이유서>에는 "미래의 전투에서도 우리는 아무리 해도 적에 비해 우세한 병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병기, 무기, 재료 또한 언제나 적에 비해 정예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어느 곳의 전장에서도 아주 적은 병력과 열등한 병기로 강행하여 승리의 영광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우리의 평소 각오로 삼아야 하므로 정신교육의 필요가 더더욱 심대하다는 것이 명확해진다"고 함으로써 정신교육에 의해 '물질적 위력을 능가한다'고 하는 일본 군대의 특징이 나타나게 된다... 동시에 군대 내에서의 사적 제재가 일상화되며, 나아가서는 포로의 따귀를 때리는 등 학대를 낳은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6장, 주전론과 비전론의 세기, 259쪽)

** 역자 후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역자는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대학원생들과 이 책을 함께 읽은 바 있다... 함께 읽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만든 초벌번역이 이번에 큰 도움이 되었다. 전영욱 군은 초벌번역을 하나로 다듬느라고 애를 많이 썼다. 그렇지만 모든 문장을 다시 검토하고 고쳤기 때문에 번역에 대한 모든 책임은 역자에게 있다. 함께 이 책을 읽은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대학원생들에게 고맙다는 뜻을 전한다."

초벌번역했고, 그걸 다시 하나로 '다듬은'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게 하니라 공동번역자로 이름을 올려야 하지 않을까. 















양자오(지음), 박다짐(옮김), <미국 헌법을 읽다>, 유유, 2018

"13개 주의 인민이 독리전쟁으로 쟁취한 독립과 자유도 보존해야 했고, 행동력을 갖춘(필연적으로 강제력도 있는) 정부도 조직해야 했다. 이것이 필라델피아 회의 대표들이 처한 양난이었다. 127일의 긴긴 토론 중에 한 가지 총명하고 기묘한 해결 방법이 떠올랐다. 각 주를 능가하는 강대한 정부를 세우자. 그러면서도 동시에 신성에 가까운, 위반할 수 없는, 변경하거나 번복하기 어려운 헌법을 통해서 정부의 자유를 분명하게 규정하자. 정부가 오로지 헌법이 그어 놓은 엄격한 경계 안에서만 행동할 수 있고, 헌법을 뛰어 넘어 임의로 어떤 일을 하지는 못하도록." (5장, 헌법이 공직자의 종교다, 199쪽)

"선거인단 제도는 형태를 달리한 직접 선거다. 직접 선거의 '형태를 달리'한 것은 주권(州權)을 위해서였다. 단순한 직접 선거를 채택하면, 미국 연방 대통령은 모든 미국인이 선출한 대통령이 된다. 그는 주의 구분을 넘어서서 인민에게 직접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각 주의 입장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각 주의 정치 지위와 기능은 연방과 대통령에 비해 반드시 하락하고 감소할 것이며, 대통령이 쥔 행정권은 구성 원칙상 입법권과 틈이 생기게 된다."(6장, 대통령제를 시행하려면 준법 사회가 필요하다, 218쪽)



베르너 파울슈티히(지음), 황대현(옮김), <근대초기 매체의 역사>, 지식의 풍경, 2011(2쇄)

"이상의 상황을 종합해서 단순하게 표현해 본다면, 전통적인 지배는 사회를 특징짓는 우월성을 상실하고 예컨대 직업적 역할로 용해되어 버린 전통적인 매체들에 근거하고 있었던 데 반해, 반란은 경향적으로 새로운 의사소통 매체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4장, 도시 신분제 사회의 매체, 122쪽)

"구텐베르크가 아니라 루터에 와서야 비로서 매체의 역사에서 구술 매체 문화에서 문자 매체 문화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매체사적으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루터의 소책자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6장, 매체의 역사로 본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255쪽)

"미사는 신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 앞에서 이루어지는 연출이었다. 개신교의 찬송가는 혁명적으로 초대 교회의 관행을 다시 끄집어냈다.루터는 예배의 핵심적인 전례 소품으로서 통속어로 부르는 평신도 찬송을 다시 도입했다."(263쪽)

"그러므로 종교개혁기의 매체 결합을 특징지은 것은 '오래된' 인간 매체들의 목표 지향적인 이용과 재기능화, 그리고 인간 매체가 '새로운' 인쇄 매체에 종속되었다가 결국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274쪽)

"광범위한 의미에서 선전은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선전은 시원기의 종족 형성 과정과 희생 제의, 춤, 성직자와 같은 매체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다양한 고도 문화 단계에서는 예컨대 그리스와 로마 통치자들에 의한 연극의 정치 도구화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선전이라는 단어는 독특하게도 종교적 기원을 갖고 있는데, 프로파가레 propagare는 씨를 뿌린다는 말로 올바른 믿음을 확신시키는 것을 뜻한다."(7장, 30년 전쟁 시기까지의 선전 매체 전단지, 282쪽)

"정치, 경제적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한 정보 교환의 필요성이라는 배경 위에서 신문 매체는 같은 시기에 특정한 변화를 겪던 다른 매체들의 핵심적인 기능을 통합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신문은 인간 매체 가인이 갖고 있던 시사성의 요소를 넘겨 받았고.. 주기성의 요소는 문화 영역이 세분화하는 과정에서 단지 종교적인 맥락에서만 중요성을 지니게 된 이전의 인간 매체 설교자와 서신 매체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신문과 관련해서는 매체 문화의 변화가 다른 양태로, 즉 명백히 기능적 통합의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문은 매체 문화 발전의 완전히 새로운 단계를 대표하고 있으며, 이 기능적 통합이야말로 오늘날의 멀티미디어와 온라인 네트워크에까지 이르는 근대의 전형적인 특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9장, 신문, 346쪽)

"이 새로운 공공영역은 생산적 측면에서 다원주의적이었고 형식적으로는 영속적인 유통의 장으로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수용의 측면에서는 신분 세력과 특정 영역을 뛰어넘었고 가공 방식에서는 다기능적 특성을 보였다."(366쪽)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적으로 서적에만 집중하거나 다양한 개별 매체들을 세분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오류에 빠져 버린 기성의 시각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적 인쇄'가 아니라 사회 변화의 요인으로 작용한 인쇄가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특히 부르주아 문화 매체인 서적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은 매우 점진적이었고 근대 초기의 서적은 18세기가 되기 전까지는 문화적 선도 매체의 지위에 여전히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11장, 인쇄, 387쪽)

"현재의 연구 성과에 의거하여 인쇄의 다섯가지 핵심적 현상을 강조할 수 있겠는데, 재료(종이)와 기술(활자), 사회적 맥락(도시), 제작 과정에서의 조직화(직업적 세분화), 핵심 기능(영리), 상반된 수용("문화 충격")이 바로 그것이다.(388쪽)

"의사소통 혁명"을 가져온 것은 새로운 의사소통 기술을 '발명'한 데 있지 않았다. 도리어 점점 더 세분화하는 사회 속에서 조정 및 방향 설정 기구로서 전통적인 인간 매체의 유용성이 사라져 간 상황이 보완되어야 했던 것이고 바로 이러한 공백과 이런 새로운 필요야말로 문화적 변화를 매체의 변화로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다. 상인, 관료, 설교자,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근대 초기의 인간들이 새로운 욕구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매체들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399쪽)

"이 시대의 사회 변화의 핵심 영역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은 인쇄나 인쇄 매체 서적이 아니라 인쇄 매체에 의한 인간 매체의 복합적인 대체 과정과 수요의 측면과 관련해서 특히 전단지, 소책자, 신문과 같은 개별 매체들의 점증하는 지배력, 특별한 적합성 및 이용이라 할 수 있다. 인쇄를 통한 기계화는 면벌부에서 전단지를 거쳐 서적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쇄 매체 제작물의 표준화와 전체 매체 문화의 천편일률화를 의미했다."(437쪽)

"이로써 1400년에서 1700년 사이의 매체의 역사에 적용될 수 있는 핵심적인 특징은 이미 언급한 셈이 되었다. 전통적인 인간 매체의 우위에서 새로운 인쇄 메체의 우위로의 근본적인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새로운 매체 문화는 단지 여러 전제 조건 중의 하나에 불과한 새로운 활판 인쇄술의 결과로 이룩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수요와 필요의 상황에 따라 예전의 낡은 매체들의 핵심적인 기능이 통합됨으로써 생겨난 것이었다."(결론, 근대 초기의 매체 문화, 461쪽)






무라카미 하루키(지음), 양억관(옮김), <언더그라운드>, 문학동네, 2017(10쇄)

"도요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 동료 히로세 겐이치가 그랬듯이 - 주어진 '교리'에 대해 더욱 강한 신념을 가지고서 솟구쳐오르는 의문을 억제하고 인간성을 잊고 상상력의 창을 닫아 행위의 논리적인 정당성을 확립하는 것뿐이었다.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 차에서 뛰어내리기보다는, 또한 그 이후의 책임을 짊어지기보다는 명령에 따르는 쪽이 훨씬 더 편했기 때문이다". (273쪽)

"청소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한 가지만이라도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것을 가지자고 결심했고, 그것이 청소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청소만은 자신이 있다고 한다." (632쪽)

"형은 전쟁이 끝난 뒤 만주에서 우크라이나의 타슈켄트로 가서 강제노역을 했어요. 기술자여서 트랙터 운전을 할 줄 아니까 빨리 보내주지 않았던 겁니다. 시베리아의 수용소와는 달라서 대우는 좋았나봐요. 쓰루가로 돌아온 것이 패전 후 팔 년이나 지난 1953년이었습니다. 1950년 형에게서 편지가 한 통 도착하기까지 도대체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것조차 몰랐습니다." (635쪽)

"옴진리교에 귀의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아사하라가 수여한 '자율적 파워 프로세스'를 획득하기 위해 자아라는 귀중한 개인자산을 아사하라 쇼코라는 '정신은행'의 대여금고에 열쇠째 맡겨버린 듯하다. 충실한 신자들은 자진해서 자유를 버리고, 재산을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세속적인 가치판단 기준(상식)을 버렸다. 정싱적인 시민이라면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일이'하고 어이없어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지극히 마음 편한 일이다. 왜냐하면 일단 누군가에게 맡겨버리기만 하면 일일이 혼자 고생해서 생각하며 자아를 콘트롤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708쪽)

보수주의 잡담

사무엘 헌팅턴은 보수주의에서 주장하는 기본 내용을 여섯 가지로 정리했는데, 그 중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사회는 점진적 역사 과정을 통하여 성항한 유기체다. (사회가 갑자기 한순간에 개조될 수 없다)

2) 공동체는 개인보다 우월하다.(사회와 유리된 원자적 개인은 불가능하다) 

3) 인간은 궁극적, 도덕적 의미를 제외하고는 불평등하다. (타고난 불평등이 있다는 뜻) 

4) 현재의 해악을 고치려는 기도는 대개 더 큰 해악을 초래한다. 


'보수주의'는 특정한 주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지키려는 '태도'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보수주의는 적극적인 자기 주장을 갖지 않으며 현행하는 것을 바꾸려는 시도에 대해 매우 엄격한 기준으로 비판한다. 이러한 보수주의는 프랑스 혁명을 비판한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에서 이론적인 기원을 두고 있다. 물론 특정한 이념이 아니므로 그 논리구조가 엄정하지는 않다. 


소위 한국의 '보수'가 괴멸되었다고 하는데, 그들이 뭔가를 지키려 했다는 의미에서는 '보수'가 맞지만, 사회의 유기체성을 옹호하지도 않았으며, 공동체를 우선하지도 않았으므로 진정한 보수라고 할 수는 없겠다. 오히려 위에 정의한 기준에 따르면 내가 더 보수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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