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다 나오코(그림), 주원일(옮김), <중쇄를 찍자1~6>, 애니북스, 2016(4쇄)


생활규칙 잡담

早上学习, 晚上素食, 周中禁酒

사도행전 초반부에 나타난 코이네Koine 그리스어 사용 수업

그때 예루살렘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 
(사도행전 2.5)

이 무렵 신도들의 수효가 점점 늘어나게 되자 그리스 말을 쓰는 유다인들이 본토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사도행전 6.1)

예루살렘 교회에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쓰는 토박이 유다인 그리스도인들, 그리스어를 쓰는 해외 유다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6.1의 히브리계 사람들은 이스라엘 토박이 그리스도인들로서, 열두 사도가 그들의 지도자들이었다. 이와는 달리 헬라계 사람들은 해외로 이민갔다가 되돌아와 예루살렘에 정착한 유다인 그리스도인들로서, 이른바 일곱 봉사자가 그 지도자들이었다. 두 부류의 교우들은 언어 차이 때문에라도 따로 모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신학 사상도 상당히 달랐다. 곧, 히브리계 교우들은 성전제사에도 참석하고 율법도 지키는 데 반해, 헬라계 교우들은 성전과 율법을 중요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주교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사도행전 주석

결론적으로, 헬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박해로 흩어진 것을 계기로 지중해 여러 지역에서 우선은 유다인들에게, 나중에는 이방인들에게까지 전도했다. 마침내 헬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다교 율법을 강요하지 않게 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독립 종단으로 만드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 때부터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함께 지내며 자유로이 돌아다니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대담하게 전도하며 그리스 말을 하는 유다인들과 이야기도 하고 토론도 하였다. 
(사도행전 9:28-29)

한편 요빠에는 다비타라는 여신도가 살고 있었다. 그 이름은 그리스말로 도르가, 곧 사 사슴이라는 뜻이다.
(사도행전 9.36)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읽기 수업

* 읽는 방법

1년에 3회 읽는 것을 목표로 한다.(2월부터 6월까지 2회 읽고 7월 8월은 쉰 다음 9월부터 11월까지 1회 읽기)

주4일, 하루에 20분씩 같은 자리에서 1강씩 읽는다.
일주일에 4강씩 10주(2달 반)동안 1회차 독서
1회차 독서가 끝난 후
‘첫 시간’을 A4 용지 한 장에 나름대로 요약한다.

2회차 독서를 시작한다.
1강씩 읽기 전에 자신의 요약문을 읽는다.
그러면 요약문을 40회 읽게 되고 2회차 독서가 끝나면 나름의 눈을 가지게 된다.
2회차 독서가 끝난 다음 31강을 A4 용지 한 장에 요약한다.

3회차 독서에서는 매번 31강 요약문을 한번씩 읽는다.
9월부터 3회차 독서를 시작하여 11월에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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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의 지, 자신이 무지의 상태임을 자각하는 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의 위험에 처하는 것, '나 이것 모릅니다!' 이렇게 선언하는 것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인지 작용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 세계를 인식하고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만들어내는 존재 자체를 총체적으로 뒤흔드는 것이며, 이 상태로 들어가야만 비로소 앎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첫시간


"우리가 <신들의 계보>를 읽으면서 그것의 내용도 따져봐야 하지만, 종래의 철학이라는 것에 포함시킬 수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지금 <신들의 계보>를 읽는 이유는 이러한 우주론 안에 철학적 사색의 맹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신화(뮈토스)에서 이성(로고스)로의 전환, 이것이 철학의 시작이다'라는 말은 일단 배제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강 : 우주론, 철학적 사유의 시작


"구약성서 <창세기>의 창조설화와 비교해보면 <신들의 계보>가 가진 특징이 드러납니다. <창세기>에서는 세계가 신에 의해 창조됩니다. 신이 창조의 궁극적인 원인인 것입니다. 동시에 창조된 것들은 신의 뜻의 지배를 받습니다. 신이 피조물의 원리인 것입니다. 묶어서 말하면, 신은 세계의 원인이자 원리입니다. 이 신은 세계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반면 <신들의 계보>에서 카오스는 빈 공간일 뿐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되는지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만약 카오스가 처음에 생겨난 시초이면서 동시에 그 뒤에 이 우주에 형성되는 모든 것들이 카오스에게 일정 정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카오스로부터 힘을 받는다면, '카오스는 시초이면서 동시에 원리', 즉 시원(Anfand)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는 분명히 아닌 것 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강 : 희랍 사유에서 우주의 구조와 생성 과정


"따라서 <서양 과학 사상사>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교과서처럼 읽힐 것이고,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해석이 어떠하냐에 따라 이 책의 내용도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해석이 그냥 형이상학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재미 삼아 읽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학문의 서술에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3강 : 존재의 근본 개념, 파르메니데스


"있음에 관한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은 운동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에 의하면 운동이 있다고 말하는 자는 참된 누스에 의해 사유하고 분별할 줄 모르는 자입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이 주장을 플라톤이 받아들였다고 해봅시다. 플라톤의 이데아(형상)는 불변의 초월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스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형상은 파르메니데스가 말하는 초월적 일자를 염두에 두고 구상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는 플라톤의 형상론의 이론적인 선행 모형인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에서는 누스로만 파악될 수 있는 초월적인 일자의 세계와 감각기관에 알려지는 거짓 세계, 두 개의 세계가 분명히 대립됩니다. 이것은 이원론입니다. 이원론이 파르메니데스부터 시작되는 셈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4강 : 일자와 두 세계 이론, 파르메니데스에 관한 '전통적' 해석


"인간은 많은 싸움을 담은 논박 속에서 누스를 이용하여 잘 배열되어 있는 전체인 세계로부터 그럴듯한 것, 진리 닮은 것을 얻어낼 수 있고, 신은 인간에게 그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진리 닮은 것은 자연에 대한 법칙입니다. 그러나 법칙은 진리가 아닙니다. 법칙은 불변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주 틀린 거짓은 아닙니다. 법칙은 거짓도 진리도 아닌, 진리를 닯은 것입니다. 법칙은 자연을 누스로써 파악하는 인간이 얻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 이렇게 보면 파르메니데스는 초월적 형이상학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자연 현상을 누스로써 파악하여 그것이 움직이는 법칙을 탐구할 것을 촉구한 사람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5강 : 대상 세계에 관한 탐구, 파르메니데스에 관한 현상-법칙 해석


"그 어느 것에도 관여하지 않은 철저한 관조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 학의 근원적 입장입니다. 학을 하고 있는 자는, 학을 하려는 자는 이러한 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취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학의 출발에서만이 아니라 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방향과 방법이 옳은지를 따져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단편 2는 학의 시원에 관한 논의, 의심하고 반성하는 태도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파르메니데스는 그릇된 길에 대해서는 애초에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릇된 길, 있지 않은 길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있음의 길만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릇된 길, 잘못된 길도 생각해봐야 됩니다. 그래야 완전한 생각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단에 빠지게 됩니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 모순입니다. 하나가 성립하면 다른 하나는 절대로 성립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길로 갈 것인지를 반성하는 최초의 사유는 모순되는 것들에 대한 생각인 것입니다. 이것들은 현실에서는 동시에 있을 수 없지만 인간의 사유 속에서는 동시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러한 모순된 상황을 견디면서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있음도 생각하고 동시에 없음도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가장 근원에 놓여 있는 사유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6강 : 학문 탐구의 방법, 파르메니데스에 관한 '학의 시원' 해석


"또한 여러 해 동안 꽃이 피는 것을 봐왔던 두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한 사람은 그러한 관찰을 통해서 '이맘때면 꽃이 핀다'는 법칙에 이르렀습니다. 방금 말했듯이 이것은 '많음'에서 '하나'로 귀결된 것입니다. 이 '하나'는 반드시 숫자 하나를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례들에서 이끌어진 보이지 않는 법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법칙을 이끌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로고스를 아는 사람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여러 해 동안 꽃이 피는 것을 보았어도 그것으로부터 하나의 법칙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여러 해의 많은 경험뿐인 것입니다. 그는 많음에 머물러 있는 '힘없는 사람'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꽃이 피는 현상이 여전히 낯설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7강 :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 로고스(헤라클레이토스)

"우리는 지금까지 헤라클레이토스의 단편들을 읽었습니다.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인 전체가 있고, 그것의 계기들은 서로 대립되면서, 끊임없이 운동하면서 전체의 자기정체성을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하게 '만물은 변한다'라는 주장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강물의 비유'에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강물의 운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강이 강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가 일종의 일원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달리 말해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변화가 전부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변화를 통해서 하나가 유지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
이 단편에 따르면 플라톤은 헤라클레이토스를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만물유전론자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가 제시된 플라톤의 대화편은 <크라튈로스> 편인데, 크라튈로스는 소피스트이자 극단적인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입니다. 이 대화편에서 플라톤은 극단적인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인 소피스트를 논박하려고 합니다. 거칠게 규정하자면 소피스트들은 진리가 불변의 것이 아닌 상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는 바로 헤라클레이토스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소피스트 상대론의 이론적인 근거는 헤라클레이토스이고, 소피스트를 논박하려면 헤라클레이토스를 논박해야 하므로 헤라클레이토스의 주장을 어떤 식으로든 규정해야만 하는데, 그것을 극단적인 만물유전론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플라톤은 이것에 대립하여 불변의 형상을 내세웁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8강 : 변화하는 여러 현상들과 궁극적인 '하나'(헤라클레이토스)

"가장 이상적인 것은, 겪어서 얻어낸 지혜와 객관적 세계에 관한 명석판명한 지식을 겹합해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지혜와 지식의 형이상학을 구축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겪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지혜도 확실한 방법을 통해서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사에 대한 학적 체계적 정초를 내려놓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크라테스가 시도했던 '자연학에서 인간학으로의 전환'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정초를 위한 궁극적 근거를 마련하는 일입니다. 달리 말해서 인간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내놓을 근거를 찾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인 플라톤은 그것을 '좋음'이라 보았습니다. '좋음'은 '착함', '아름다움', '올바름' 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
다시 말해서 불변의 좋음에 관한 철학적 통찰과, 시행착오를 거쳐서 잠정적으로 내놓은 역사적 지혜는 양립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둘을 놓고 우리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학에서 인간학으로의 전환'이라는 주제에는 이처럼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습니다. 이것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따져보는 것이 우리가 플라톤을 읽는 까닭입니다. 
(...)
<파이돈>의 표면적인 주제는 '혼의 불멸'이고, 혼의 불멸을 논증하기 위해서는 형상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사는 동안 영혼을 잘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파이돈>에서는 실천적 차원에서 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밝히는 논변들이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형상론을 중심으로 이것들을 살펴보는 것이 <파이돈> 읽기의 첫째 과제입니다. 둘째 과제는 변증법이라는 방법론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논박술과 산파술로 되어 있습니다.
(...)
질문을 받았을 때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대답을 하면 그것은 '무지의 무지' 상태입니다. 소크라테스가 계속 질문을 하여 자신이 사실은 모르고 있었음을 알게 되면 그것은 '무지의 지' 상태입니다. 이 무지의 지 상태가 바로 정화가 일어난 상태인 것입니다. 이렇게 완전히 비워내고 무지의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참된 진리를 채워넣을 수 있습니다. 참된 진리를 채워넣는 것은 산파술을 통해서입니다. 부정적 과정으로서의 논박술과 긍정적 과정으로서의 산파술이 결합된 것이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인데, 이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성립되었는지는 V.3.소크라테스의 탐구 방법에 관한 논의:'차선의 방법'(두번째 항해)에 나와 있습니다. 이 과정은 '자연학에서 인간학으로의 전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인간의 영혼과 형상이라는 목적 <파이돈> , 제9강 : 잘산다는 것 

"소크라테스는 인간을 본격적인 탐구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탐구를 위한 방법론을 찾기 위해 아낙사고라스를 읽었습니다. 그 방법으로는 좋음을 규정할 수가 없었는데, 좋음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분석하고 종합해야 할 대상은 '눈에 보이는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의 세계'였습니다. 좋음은 고정된 것일 수 없고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좋음이 고정 불변의 실재로 있으려면 인간에 대한 규정도 불변의 실재로 해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좋음의 존재론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좋음의 존재론은 좋음의 논리학과 같은 의미가 될 것 입니다. 불변의 좋음이 저기에 있고, 그것에 상응하는 불변의 논리학이 여기에 있습니다. 좋음의 존재론(좋음의 논리학)이 성립할 수 있으려면 인간에게 우연적인 것이 결코 일어나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타협책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좋음의 유형론일 것입니다. 다양한 경우의 수를 상정하여 유형을 만들어놓고 그때그때 꿰어맞춰 보는 것입니다. 불변의 좋음이 있다면 그것의 법칙을 파악하여 좋음의 논리학을 만들고 그것을 예외없이 적용하면 될 것이지만, 좋음의 유형론에서는 이런 방식을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좋음의 유형론은 파라데이그마paradeigma, 즉 잠정적 모형을 전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형을 만들어두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적용해야 합니다. '상황에 맞춰' 적절함을 찾아내는 능력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 능력은 일종의 본을 가지고 현실의 구체적인 상황을 살펴보는 힘을 가리킬 것입니다. 이렇게 살펴보는 힘은 본을 모방(mimēsis)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진리를 가질 수 없고 진리 닯은 것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모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0강 : 형상실재론, 형상시원론 

"소크라테스가 찾은 것은 '무엇'이고, 이것은 추론의 시작점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찾은 것은 불변의 실재가 아니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는 로고스들입니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귀납적 추론과 보편적 정의"라고 말합니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둘째 항해를 달리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은 학문의 시작과 관련된 것입니다. 일단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논의의 출발점을 찾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한 차선의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의미 규정이 된 말들(logoi)을 매개로 이성(logos)에 의해 존재하는 것들의 진리를 고찰을 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증법(dialektiē)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
이 고찰은 어떤 절차를 따르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가장 견실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내가 판단하는 것을 원칙으로 가정하고서, 이와 합치하는 것으로 내게 생각되는 것들은 참된 것들로 간주합니다. 그다음에는 앞서 세운 원칙과 어긋나는 것들을 식별합니다. 이렇게 식별하는 것이 '앎'입니다. 이것을 불변의 실재인 형상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 능력을 가지는 것일 뿐입니다. 분별 능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무지입니다. 무지는 불변의 실재인 형상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논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출발점을 합의하는 힘이 없는 상태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1강 : 합의된 규약에 의지하는 '차선의 방법'

"<파이돈>의 형상 논변은 인간의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입니다. 인간이 확실한 앎을 가지기 위해서는 나면서부터 확실한 것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혼이 불멸해야 합니다. 인간은 불멸하는 이 영혼을 잘 단련해야 형상에 대한 앎을 가질 수 있습니다. <파이돈>에서 형상에 관한 논의는 인간의 영혼에 관한 논의에 부수적인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2강 : 같음과 같음 자체에 관한 논변 

"태양의 비유를 다시 정리해봅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잘 보려면, 즉 보는 힘을 가지려면 빛이 필요합니다. 빛은 어디서 옵니까. 태양에서 옵니다. 다시 말해서 태양은 보는 힘을 제공합니다. 태양은 가시계에 힘을 주는 원인이 됩니다. 힘(dynamis)인 태양 빛이 강할 때는 또렷하게 보입니다. 이것은 낮의 빛에서 보는 것이고, 빛이 약할 때는 밤처럼 어스름하게 보입니다.대상은 같은데, 즉 같은 대상을 태양 빛으로 보는데, 그 강도가 다릅니다. 가시계가 작동하는 방식은 이러합니다. 지성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은, 보는 장소가 다릅니다. 좋음이 주는 힘에 의해서 보는 장소가 다른 것입니다. 태양의 비유에서는 힘만이 서로 상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정치 공동체, 넓은 의미의 인간학 <국가>, 제13강 : 참으로 좋은 것에 관한 앎(태양의 비유)

"진리를 아는 것은 고난을 겪어가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는 것은 자신에게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자기가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익숙한 것이라 하여 인식된 것은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
태양의 비유는 인간에게 참된 진리를 알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밝혔습니다. 선분의 비유는 그 참된 진리가 어떠한 단계를 거쳐가는 것인지를 논증하였습니다. 동굴의 비유는 누가, 어떤 방식으로 진리를 알아내는지를 이야기했고, 그렇게 알아낸 진리를 무지한 이들에게 가르쳐주는 실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동굴의 비유 첫머리는 교육이라는 실천을 암시하면서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4강 : 참으로 좋은 것에 관한 앎과 그것의 실천(동굴의 비유)

"이론은 본질 존재인 상재를 지적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파악한 상재를 전거로 삼아서, 또는 그것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해도 그것을 닯은 하나의 본이라도 만들어서, 그 본을 바라보면서 정재를 바꾸어나가는 것이 실천입니다. 실천은 겪음의 과정입니다. 아무리 겪는다 해도 좋음이라는 상재가 없으면 그 겪음은 경험의 축적일 뿐입니다. 악한 것도 쌓이면 탁월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좋은 것이 쌓여도 탁월함이 됩니다. 참된 탁월함은 좋은 것이 쌓이는 것입니다. 
(...)
철학적 통치자뿐만 아니라 인간은 '힘'(dynamis)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태, 즉 정재를 변경시켜야만 합니다. 상재의 파악은 이론이고 정재의 변경은 실천인데, 이러한 이론과 실천, '실천을 통한 이론', '이론을 위한 실천'은 인간 개인이 아닌 정치적 공동체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좋음의 이데아를 중심으로한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이처럼 이론과 실천이 중첩되는 차원에 놓여 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5강 : 아는 것과 하는 것, 이론과 실천의 통일

"이론학에 속하는 것 중에서 신학에 관하여 설명을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신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초월적인 인격 신에 대한 탐구'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신(theos)은 제 1의 원인입니다. 달리 말하면 '첫째가는, 가장 지배적인 원인'이라고도 합니다. 신은 첫째가는 가장 지배적인 원인이기 때문에 초월적인 것이 아닙니다. 신은 존재의 세계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학이라 해도 모든 존재들(ta onta)을 다루는 존재론에 통합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격을 가지는 신을 논의하는 저작이 <형이상학>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아리스토텔레스:희랍 형이상학의 체계적 완결, 제16강 : <형이상학>의 구성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학문의 출발점은 '놀라움'(thaumazein)입니다. 놀라움에서 시작된 학문의 영역에는 이론학, 실천학, 제작학,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앎이라고 하는 것은 감각적인 앎부터 시작해서 기억, 경험, 그다음에 기술이 있고, 논증적 지식(입증 가능한 지식)과 제일원리를 파악하는 직관적 지식이 있으며, 그 둘을 합한 지혜에 이릅니다. 거듭 말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서 감각지부터 시작하여 지혜에 이르는 과정은 누적적인 앎의 과정입니다. 대체로 보아서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째가 감각지의 단계이고, 그 다음이 경험과 기술의 단계이며, 마지막이 논증적 지식, 직관적 지식, 지혜의 단계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7강 : 앎의 종류와 단계들

"특수한 것들만 있다면 학문적인 인식은 불가능합니다. (...) 우리 눈앞에 수다하게 있는 특수한 것들을 보편적 술어로써 설명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들 안에 내재해 있는 본질을 찾아서 그 본질 연관을 살펴서 묶으려는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여긴다면, 그것들을 우연적인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우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면 인식 자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학적 인식이 성립하려면 각각의 특수한 것들에 내재해 있는 실체를 찾아야 하고, 특수한 것들에 내재해 있는 실체적인 것은 불변해야 합니다. (...)
그런데 이 실체적인 것이 특수자들 안에만 들어 있다면, 특수자들이 생성 소멸함에 따라 그것도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실체는 특수한 것들에 내재해 있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특수자 안에 내재해 있음과 동시에 그 생성 소멸의 변화를 겪고 있는 특수자와 분리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형상이 특수자에 내재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분리되어 있다고 하면, 특수자와 형상의 관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형상은 특수자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특수자 밖에 있을 수 있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학이 성립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8강 : 형상의 분리와 내재   

"앞서 우리는 형상의 분리와 내재에 대해서 논의하였습니다. 형상이 있어야 그 형상으로 인해서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수다한 특수자들이 우연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실체적인 것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 눈앞에 있는 수많은 존재자들, 있는 것들을 탐구할 때 하나의 일관된 학문 체계를 가지고 꿜 수 있는지를 물었고,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가는 것을 탐구하는 첫째 철학이 첫째가는 것과 존재들, 있는 것들을 관계시켜야만 학문의 체계가 완성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보편적 존재론과 첫째 철학의 영역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심연이 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여기에다 '갑자기'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플라톤처럼 탐구하면 학이 성립하지 않고 신비주의가 된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지금 보편적 존재론을 끝까지 밀고가면 첫째 철학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편적 존재론과 첫째 철학을 '하나와의 관계'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
첫째로 있는 것을 다루는 학문은 첫째 학문(첫째 철학,prote philosophia)이고 이것은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신학은 보편적 존재론 위에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해서 보편적 존재론이 신학의 하위 학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보편적 존재론이 없다면, 신학은 외따로 떨어져 있는 학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보편적 존재론과 신학은 상호포섭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19강 : 학의 성립에 관한 물음, 보편적 존재론과 신학의 관계 

"'이것'이 '무엇'의 대상이 됨으로써, '이것'이 '무엇'으로써 규정됨으로써 '이것'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이것'의 본질, 이것의 진리를 드러내는 힘은 무엇입니까? 사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유가 정재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모든 정재의 본질을 드러내려면 세계의 모든 정재의 본질을 사유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정재에 대한 사유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것은 신에게나 가능한 사유일 것입니다. 신은 세계의 모든 정재를 사유할 것입니다. 신의 앎은 본질의 앎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신학(theologike)은 바로 이러한 신적인 앎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최고의 '무엇(ti esti)은 신이며 신적 사유입니다.
'이것'은 규정적 존재입니다. 자기 밖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자기 안에 머물러 있으니까 즉자 존재(Ansich -Sein입니다. '무엇'은 규정적 존재가 자기 바깥으로 나온 것이므로 대자 존재(Fürsich-Sein)입니다. '무엇'은 '이것'이 무엇인지를 사유하는 것입니다. 즉 '무엇'은 '이것'에 대한 반성적 사유입니다. 그런데 '무엇'과 '이것'은 같은 것들입니다. 개별자의 차원에서 보면 '이것'이고, 에이도스의 차원에서 볼 때는 '무엇'입니다. 제일 실체와 제이 실체가 사실은 똑같은 것인데 <범주론>과 <형이상학>에서 그 위치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먼저인 것과 본성상 먼저인 것의 차이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먼저인 것은 '이것'이고, 본성상 먼저인 것은 '무엇'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0강 : 실체론, '이것'(tode ti)과 '무엇(ti esti)

"그런 까닭에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론', 즉 질료, 형상, 작용, 목적, 이 네가지를 질료와 형상으로만 이야기할 수 도 있는 것입니다. 형상이 목적이기도 하고 작용이기도 하기 때문에 실체의 차원에서 말하면 그 네 개를 구별해서 말하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공부를 할 수 있는 소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호기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공부를 하고 어떤 이는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가지고 설명해보면, 공부를 하지 않는 이는 공부의 목적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르고자 하는 지점, 목적이 없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부에 관한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부해야 할 사람을 움직이는 힘, 즉 목적입니다. '공부는 왜 하는가'부터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1강 : 운동론, 가능태와 현실태 

"헤겔은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이 진리의 본질적 계기이며, 데카르트는 이성으로부터 자립적으로 등장하는 철학의 출발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실상 철학에 관한 헤겔의 규정이기도 합니다. 헤겔이 여기서 말하는 이성(Vernunft)은 인간의 이성이고, 그것은 자연의 빛이기도 합니다. 철학은 이러한 이성으로부터 잘비적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알고 있는 자기의식이 진리의 본질적 계기라는 것입니다. 이 자기의식은 신과의 존재론적 의존관계를 끊어낸 자립적 자기의식입니다. 여기서 헤겔이 말하는 이 자기의식은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자기'입니다. "나는 생각한다"의 그 '자기'입니다. '내가 생각한다는 것'이야말로 진리의 본질적 계기임을 알고 있는 철학은 자립적 철학입니다. 이 철학은 신학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린 것이고, 그 자립적 철학에 착수한 사람이 데카르트입니다. (...) 철학의 근대성은 바로 이 자립적 자기의식에서 성립합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데카르트: 주체인 인간의 세계 구축, 데카르트 형이상학의 근본구도 <철학의 원리>, 제22강 :자기의식, 데카르트 철학의 근대성

"여기에 데카르트 형이상학 전부가 정리되어 있습니다. "인간 정신이 인식할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명백하고 명석한 것들"을 알아내는 방법이 논의되고 있는데, 그것의 출발점은 "의심"입니다. 그다음 데카르트는 의심하고 있는 자는 그가 "의심을 하고 있는 한,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의심한다'와 '내가 존재한다'는 인과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의심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본질은 생각이라는 것이고,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내가 신을 생각할 때에만 신의 존재가 확인될 것입니다. 내가 유한자라는 것을 자각할 때에만 무한자로서의 신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유한자라는 것을 생각할 때 나도 모르게 무한자라는 기준이 따라나옵니다. 내가 유한자라는 것을 자각하지 않으면 무한자라는 기준이 따라나올 일이 없습니다. 이처럼 무한자를 인식하는 데 있어 유한성은 필연적 계기가 됩니다. 이것이 '철학자의 신'에 관한 기본적인 테제입니다."
강유원, <철학고전강의>, 제23강, 진리의 원천과 진리 인식의 원천 
 




김택근(지음), <성철평전>, 모과나무, 2017(2쇄)

가을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명이 밝아오자 성철이 눈을 떴다.  
  "나 좀 일으켜 다오."
 성철의 마지막을 기다리는 시간이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성철이 다시 말했다. 
  "답답하구나. 나를 안아라."
 원택은 스승을 끌어안았다. 
  "새끼야, 편하게 좀 해봐라."
  지상에서의 마지막 꾸중이었다. 원택은 성철을 고쳐 안았다. 스승의 몸이 너무 가벼웠다. 창밖이 설핏 환했다. 1993년 11월 4일, 오전 7시 30분. 
  "새벽인가?"
  "네."
  "그럼 나도 가야겠다. 다들 못 보고 가겠구나."
 제자가 울음을 삼켰다. 

  "참선 잘하그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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